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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장 중 사색 (16)

이해와 인정에 관하여.

by 백취생

출장은 용무를 위해 임시로 다른 곳으로 나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한국으로 출장 오는 사람이 되었다. 임시로 있어야 할 곳이 한국이 되어 버렸다.


3개월마다 길면 2주 짧으면 1주 정도 한국에서 머문다. 그러다 보니 시간의 가치는 평소보다 더욱 중요해진다. 그런데 웃고 행복하게 보내도 모자란 시간에 누군가와 다툼으로 시간을 사용하게 되면 정말 많이 속이 상한다. 특히 아내와 다투면 가장 많이 속이 상한다. 지난 한국 출장에서도 오해에서 시작된 다툼으로 결국 서로 인사도 안 하고 나는 중국으로 나갔다. 물론 중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오해는 풀렸고, 아내는 사과했다.

사람관계에서 이런 일이 자주 없지만, 이번 일은 내가 정말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내 주변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들을 했고 난 그냥 거기에 휩쓸렸다. 심지어 아내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미안해. 이제 이해했어. 그런데 당신이 분명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이야기했어."


아내는 마음이 풀렸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오히려 마음이 답답해졌다. 분명 그때와 똑같은 내용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내는 그때와 화가 풀린 지금 듣는 나의 이야기는 느낌이 다르다고 이야기했다.


어찌 되었든 그렇게 일방적인 화해를 당한 이후 다시 온 한국 출장이다. 이런 걸 보면 나는 정말 속이 좁은 사람인 것 같다. 뒤 끝도 있는 것 같고, 아내와 있으면 내가 모르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번 한국 출장에도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우연한 기회에 부모님 그리고 딸과 함께 고모역에 방문했다. 참고로 고모역은 지금은 폐역인 간이역이다. 그곳에 설치된 전시물을 읽어 보니 과거에는 보통역으로 승격이 되었고, 많은 여객과 화물이 이 공간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고모역은 문화공간으로 변모했고, 벽 한편에는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무료로 배포되는 시집도 있고, 기증받은 도서들도 읽을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에 관리하시는 분의 말에 따르면 꽤 많은 책이 기증되었지만, 책꽂이가 협소하여 모든 책인 전시되지 못한다고 이야기해 주셨다. 그래서 일부 책은 필요하면 가져가서 읽어도 된다고 하셨다. 안 그래도 중국에 나가서 읽을 책이 필요했는데 아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열심히 책꽂이를 훑어보던 중 한 책 제목에 시선을 빼앗겼다.


<<화내지 않는 연습>>


이 책을 보는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 책을 한번 읽어 보라고 아내에게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왠지 더욱 아내의 화를 돋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하면 이번에도 중국에 나갈 때 인사를 하지 못하고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도 자신이 나보다 화가 많다는 것을 평소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사실을 돌려 이야기한다는 것이 과거 아내와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면 분명 리스크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화내지 않는 연습>이라는 책을 고모역 직원의 허락을 받아 집으로 모셔왔다. 아내에 보여줘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어떻게 화내지 않는 연습을 할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는 화내지 않기 위해 여유를 잃는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여유를 가지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는 방법이 있다면 습득하고 싶었다. 나는 가져온 책을 함께 사용하는 공동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아내가 보기 전에 어떤 내용인지 확인하기 위해 내가 먼저 책을 펼쳤다. 그리고 한 장의 쪽지를 보게 되었다.




한 가정에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었다. 그는 취업을 했고. 자신의 월급으로 어머니에게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표현과 함께 <<화내지 않는 연습>>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책을 선물한 달에 월급을 받으면 한턱을 쏘겠다고 했다. 왠지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군지는 모르는 그 아들 분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왠지 그가 어머니에게 <<화내지 않는 연습>>이라는 책을 선물한 이유가 나와 비슷한 것일까? 그도 한번 사는 삶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지내기 위해서 많은 고민과 노력을 하는 사람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선물한 년도를 보니 나와 비슷한 연배일 것 같은데,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선물 받은 그 책은 고모역에 기증되었다. 아마 어머니에게 주었으니 어머니께서 기증한 확률이 높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마치자 나는 이 책을 아내에게 보여주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 책을 가지고 중국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나 같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라고 그 책을 기증했을 것이라 믿는다.



이제 나는 어제보다 더욱 화를 잘 내지 않는 내가 될 확률이 높아졌다.

사랑스러운 누군가의 아들이 그의 어머니에게 남긴 메모


<이해와 인정에 관하여>


한때 나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해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말과 행동의 맥락을 알고, 그 감정과 선택의 이유를 헤아린 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렇게 서로 이해하면 갈등이 줄고,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해에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며,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사람 사이를 더욱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해’를 ‘헤아리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중에서 특히 헤아림이라는 과정은 매우 주관적이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 감정의 감도, 사고의 습관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상황을 두고도 그 헤아릴 수 있는 범위는 달라진다. 주변의 결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런 차이는 더 선명해진다. 누군가는 배우자의 행동이나 말을 설명하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라고 말한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일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건 좀 과한 거 아닌가?” 하고 느끼기도 한다. 즉, 나 자신조차도 나만의 이해의 범위가 있고, 그 범위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해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나는 부부사이에서는 이해 이전에 더 근본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인정’이다. 이해는 때때로 감정이나 논리를 요구하지만, 인정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의 결단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평소 불교와 관련된 철학 서적을 읽으며 가지게 된 믿음은 관계에서 인정이 무엇보다 가장 먼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와 타인을 인정하면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 관심이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이전에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서로 아직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관심이 생기면 그것을 들여다보게 되고 관찰하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해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가 여러 고통(불교에서는 八苦로 표현한다.)에 휩싸여 외롭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비를 베풀라는 이야기를 한다.


서로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부는 서로를 딱하게 여긴다. 내가 본 사이좋은 부부는 상대를 딱하게 여겨 서로에게 친절하다. 사실 우리 부모님 이야기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항상 딱하다고 하셨고, 아버지는 표현을 잘 안 하셨지만 어머니가 시집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다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없는 곳에서 다투셨을 것이다. 분명 다툼이 없는 부부가 있을 확률은 정말 낮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화내지 않는 연습>에서도 자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화를 멈추는 방법’ 중 하나로 자비를 제안한다. 누군가가 나의 감정을 건드려 분노가 일어날 때, 먼저 자비의 시선을 떠올리라고 한다. “이 사람도 괴로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의 불쌍한 중생이다. 평온해지길”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화를 내기 전에 멈추게 된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수행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당장 느끼고 있는 나의 감정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래서 책에서는 분노의 마음이 생기기 전에 알아차리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연습을 하기 위한 방법론 적인 이야기들이 책의 주 내용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책에서는 분노는 사람을 병들게 한다고 이야기하며, 분노 자체를 차단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분노가 계속되면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은 맞지만, 분노도 때로는 생존에 필요한 감정이며, 이 분노를 삶에서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 오히려 더 자신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대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과한 칭찬은 고래를 오히려 병들게 할 수도 있다. 나는 어쩌면 과한 것에 대한 자주 불편함을 느끼는 성향이라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나는 균형 잡힌 식단처럼 균형 잡힌 감정 또한 생존에 유리할 것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나에게는 분노가 생기더라도 결국은 그것을 인정하고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해진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상태 (의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초기 불교 경전에는 "의도가 곧 업이다"라는 말이 있다. 법정스님 <무소유>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두 스님이 길을 가다 강가에서 건너기 어려워하는 여인을 본다. 노승은 그 여인을 업고 강을 건너게 도와주고 그 후 아무렇지 않게 길을 가는데, 어린 스님이 왜 여인을 가까이에 했느냐는 질문을 한다. 그리고 노승은 이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여인을 강가에 이미 내려놓았거늘, 너는 아직도 아직도 마음에 업고 있는 것이냐?"


과연 그 당시의 노승은 어떤 마음 상태였을까? 노승도 남자고 분명 무엇인가 일어나는 감정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연민이었지만, 여성을 등에 업으면서 호르몬의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다. 호르몬의 변화는 조절이 어렵다. 하지만 그는 이성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떠올렸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수행자로서의 목표와 방향. 욕망을 그대로 따랐을 때 잃게 되는 것들...... 그런 생각들이 마음으로 그 여인을 강가에 내려놓은 것이 아닐까?

살다 보면, 마음이 아직 따라오지 않는데도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다시 말해 하고 싶지 않은데 해야하거나, 하고 싶은데도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이런 행동들을 습관으로 만들면 생존에 유리해진다고 생각한다. 분노가 일어나도 때로는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귀찮아도 때로는 자리에 일어나서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좋은 말이 나오지 않는 상대에게도 때로는 좋은 말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게 나와 상대방을 인정하는 노력이라고 믿는다.


누구나 처음부터 마음의 상태가 행동과 일치되지는 않는다.


<화내지 않는 연습>에서 분노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지만, 책에서 소개하는 방법론 적인 부분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불교에서 이를 수행이라고 말하며, 특히 삼학 (세 가지 기본 수행 학목)에 따르면, 먼저 행실을 바르게 하면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되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으며, 사물의 본질을 읽어 선정이 깊어지면 지혜를 얻게 된다고 한다. 인정도 그런 것 같다. 인정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상대를 인정하게 되고, 인정하면 상대를 관찰하게 되고 상대를 관찰하다 보면 결국 이해하게 (헤아려서 받아들임) 된다.


그래서 관계는 인정으로 시작되고, 이해로 끝이 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는 아내를 인정하기 위해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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