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구와의 결별을 위한 노력, 친절해지기.
사색을 하다 보면 '어쩌면 그래서 그런 건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름 생각해 보면 참으로 그럴싸한 생각인 것들이 있는데, 대체로 그런 생각들은 다른 현상을 관찰하다 우연히 머리를 스쳐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될 만한 생각들을 하면 좋으련만, 사실 그런 쪽으로는 생각을 잘 못한다. 자신이 돈을 많이 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대체로 그들은 그런 쪽으로 사색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나는 불행하지 않는 삶을 사는 방법에 대하여 사색을 많이 한다. 현재 나는 불행한 상태인가에 대해 종종 생각해 보고, 만약 그렇다고 판단되면 해결방안에 대해서 고민한다. 나는 어차피 사는 게 고통이라면, 인생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사는 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도구에 대한 사색은 출장지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다시 시작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정상·비정상으로 나누는 모습이, 마치 상대를 도구로 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 같이 한마음이면 좋겠지만, 나아가는 방향이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다름을 마치 기준이 있는 것처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고, 비정상으로 분류된 사람을 점점 차별하는 분위기를 볼 때마다 나 혼자 괜히 불편해진다.
'도구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나 매개체를 뜻한다.'
출장 중 업무를 수행할 때는 꽤 많은 품질 도구를 사용한다. 데이터를 해석하기 위해 클러스터링 기법을 쓰고, 원인과 결과를 도표로 정리한다. 문제가 파악되면 체크시트를 활용해 관리한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다 도구라고 한다. 심지어 생각하는 방식조차 도구라고 말한다. 도구의 범위는 점점 확장되어 간다.
인간이 가장 먼저 사용한 도구는 돌이라고 한다. 약 330만 년 전, 인간은 돌을 도구로 쓰기 시작했다. 150만 년 전에는 불을 다루기 시작했다. 생존을 위해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었다. 어쩌면 그때부터 인간이 도구화되는 운명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과 불을 손에 쥔 인간은 무리를 이루고, 다른 무리와 다투기 시작했다. 패배한 자는 승자의 도구가 되었다. 그렇게 노예가 생겨났다. 아마 최초로 석기를 만들던 인간은, 언젠가 자신의 후손이 도구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 도구가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종교는 한때 인간을 완전히 도구화하는 장치였다.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은 각자 태어날 때부터 도구처럼 부여된 쓰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왕과 종교가 무너진 이후, 니체가 말한 것처럼 신은 죽었다.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 의미를 선택해야 하는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그 자유 속에서 더 큰 혼란과 고립을 경험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도 되지 못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런 시대이다 보니 사람들은 오히려 익숙한 것을 찾게 된다. 스스로가 도구로 사용됨을 허용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성과주의 사회는 도구에 가치를 매기고, 성과를 낼 수 있다면 인간도 도구가 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도구는 사용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했고,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를 묻는 존재라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사용 속에서만 의미를 찾는 도구처럼 생각하고 있다.
비단 회사 안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은 아니다. 사회 전체를 보더라도, 사람이 만든 물건보다 사람이 더 못한 대접을 받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나는 현재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미래가 아니라, 이미 지금 이 순간 스스로를 도구처럼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사용 속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인간은 고독해지며, 그렇게 잊혀진다. 내가 나를 도구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타인도 도구로 보게 된다. 결국 모두가 서로를 소모품으로 여기게 되면, 그 끝은 비참할 수밖에 없다. 첫 직장을 퇴사할 때 이런 느낌을 받았다.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이런 느낌이었다. 사용 속에서만 의미가 있는 도구처럼, 마치 나는 누군가를 위해 돈을 버는 도구로만 쓰이는 별 의미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출장지에서 만나는 몇몇 사람들도 분명 과거 내가 겪었던 그런 느낌을 받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백수의 시간은 나에게 취향과 생각을 가지게 해 주었다. 그래서 백취생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다. 백수의 시간 동안 나는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정의하고, 살면서 경험한 일 들에서 의미를 찾는 사색을 했다. 도구로써 나의 쓸모는 0에 수렴했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의 쓸모를 찾아 나갔다.
운이 좋았다. 내가 스스로 존재의 쓸모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의 친절 덕분이었다. 쓸모가 0인 나에게 나의 지인들은 존재만으로 쓸모가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살면서 쉼도 필요하고, 이왕 쉬는 거 맘 편히 쉬라는 아내의 친절한 말 한마디가 나의 마음에 여유를 주었다.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고 자신의 언행에 대한 아버지의 사과는 내가 어떤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지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2년간의 취업 전선에서 방황할 때 항상 옆에서 서로 위로해 주고 함께 방황하던 친구들은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었다. 그렇게 모두가 친절했었다.
"친절하자. 나에게도 친절하고, 타인에게도 친절하자."
백수였던 나는 친절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도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항상 마음의 여유를 찾으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나라는 사람이 정의된다면 난 영화의 제목처럼 <친절한 OO 씨>가 되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나의 존재가 도구와 같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자신을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친절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나의 친절이 현재 이 장소에 함께 머물고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