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접근성이다.
그 ‘닿음’의 문제를 붙잡고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복잡한 해외 사례들 사이에서 끝내 한 단어가 남았다. "접근성"
『교집합의 함정–보건과 복지사업의 교집합 너머에서 고령화를 다시 묻다』라는 자료를 정리할 때였다. UN의 고령화 문서, 싱가포르의 돌봄 정책, 미국 지방정부의 사회서비스, 밀스 온 휠스(Meals on Wheels, 식사배달 프로그램)와 같은 사례를 잔뜩 찾아봤는데, 한동안 머릿속은 뒤섞인 지도처럼 복잡했다. 이름도 낯설고, 제도도 복잡했다.
그럼에도 마지막에 남은 말은 의외로 단순했다.
“결국, 접근성이다.”
돌봄이든, 고령화든, 생애주기든, 제도가 있느냐 없느냐만큼 중요한 건 그 제도에 ‘실제로 닿을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료를 붙잡고 씨름하기 전부터, 나는 ‘지역사회 생활돌봄’이라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 말은 보건복지부가 말하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커뮤니티케어)’과는 조금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정부의 통합돌봄은 나이가 들거나 아프거나 장애가 생겨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할 때, 사람들이 살던 동네에서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집·의료·요양·돌봄·일상생활 지원을 한꺼번에 묶어 제공하자는 방향을 담고 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제도 중심에 두겠다는 점에서 취지도 분명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정책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초점은 ‘돌봄의 필요가 이미 커진 시점’에 맞춰진다. 이미 돌봄이 많이 필요한 노인, 장애인 같은 분들에게 어떻게 더 잘 닿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구조다.
나는 이 지점에서 한 번 더 묻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직은 괜찮아 보이는 사람들, 언젠가는 돌봄이 필요해질 사람들은 어디에 서 있을까?”
그 질문에서 내가 붙잡게 된 말이 ‘생활돌봄’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활돌봄은 새로운 사업을 잔뜩 더 얹자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미 동네에 흩어져 있는 것들을 주민의 입장에서 한 번 더 꿰어 보자는 것이다.
동네 병원, 보건소, 작은 도서관, 행정복지센터, 경로당, 복지관, 어린이집, 학교, 약국…. 차분히 떠올려 보면, 우리는 이미 꽤 많은 자원 속에 살고 있다. 각 기관마다 주민을 위한 프로그램과 서비스도 적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도움 되는 서비스가 이렇게 많은데, 왜 사람들은 그냥 지나칠까?”
“분명 제도는 있는데, 꼭 필요한 분들이 왜 여전히 ‘제도 밖’에 머무는 느낌일까?”
바로 여기서부터가 접근성의 문제라고 본다.
제도가 없어서가 아니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알아도 가기가 번거로워서, 가도 나와 맞는지 모르겠어서…. 그렇게 결국 ‘있는 제도’가 일상에서는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생활돌봄은 특별한 돌봄이 필요한 소수만을 위한 별도 통로라기보다, 이 동네에서 살아가는 누구라도 필요할 때 가볍게 기댈 수 있는 일상의 기둥이다.
가만히 돌아보면, 돌봄이 전혀 필요 없는 시기는 거의 없다. 다만 시기에 따라, 형편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질 뿐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돌봄은,
퇴근 시간까지 아이를 함께 맡아주는 어린이집, 초등 돌봄교실, 지역 돌봄센터 같은 곳으로 나타난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아이가 안전하게 지내고 있구나” 하고 안심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들이다. 이 역시 생활돌봄의 한 모습이다.
학업과 취업 사이에 서 있는 청년에게도 돌봄은 필요하다.
이 시기의 돌봄은, 마음이 지치거나 막막할 때 부담 없이 찾아갈 수 있는 상담 창구, 흐트러진 생활 리듬을 다시 정리해 볼 기회를 주는 프로그램·공간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혼자 견디지 않아도 될’ 자리를 동네에 만들어 두는 것, 그것도 생활돌봄이다.
부모를 챙기고 있는 중장년에게 돌봄은,
“혼자 다 떠안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을 해주는 것에서 시작해, 지역의 요양·의료·방문서비스를 함께 찾아보고 연결해 주는 사람과 창구로 이어진다. 돌봄 부담을 나눠 들 수 있게 해주는 이 연결 또한 생활돌봄의 중요한 한 조각이다.
혼자 사는 노인에게 돌봄은,
“혹시 오늘 하루 연락이 닿지 않으면 먼저 안부를 확인해 줄 사람이나 기관이 있다”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과도 같다. 전화 한 통, 문 두드림 한 번이 실제로 작동하도록 뒷받침하는 제도와 관계망 역시 생활돌봄의 일부일 것이다.
모습은 이렇게 달라도 그 중심에는 늘 같은 질문이 있다.
“필요한 순간, 이 사람이 이 도움에 쉽게 닿을 수 있는가?”
나는 생활돌봄을 이 질문에서 출발하는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생활돌봄의 출발점은 자격요건과 서류 목록이 아니라,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가”에 대한 상상이다.
아침, 아이 손을 잡고 어린이집에 가던 부모가 돌아오는 길에 보건소 벽에 붙은 안내문을 보고 “아, 이번 주가 무료 예방접종 기간이구나”를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동네.
오후, 퇴근길에 들른 작은 도서관에서 “오늘은 마음이 지친 분들을 위한 짧은 강연이 열립니다”라는 안내를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동네.
저녁, 옆집 어르신 댁 불이 며칠째 꺼져 있으면 “괜찮으신지 한 번 함께 확인해 볼까요?”라고 조심스레 말 꺼낼 수 있는 관계가 아직 남아 있는 동네.
생활돌봄은 이런 장면들을 우연에만 맡겨 두지 말고, 정책과 구조로 조금 더 의도적으로 만들자는 제안이다.
통합돌봄이 이미 돌봄이 많이 필요한 분들을 ‘지금 사는 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게’ 지탱해 주는 단단한 손이라면, 생활돌봄은 아직은 건강해 보이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너무 힘들어지기 전에, 필요해지기 전에’ 가볍게 받쳐 주는 넓은 손에 가깝다. 둘은 서로를 대신하는 게 아니라, 서로의 빈틈을 메워 주는 짝일지도 모른다.
『교집합의 함정』을 정리하면서 내가 얻은 작은 결론은 이렇다.
“교집합이냐, 중복이냐, 효율이냐”를 따지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정작 사람에게 닿지 못하는 서비스가 되면 의미가 없다.
반대로, 조금 겹치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 덕분에 더 많은 사람이, 더 이른 시기에, 더 편하게 도움을 받게 된다면 그 중복은 한 번쯤 감수해 볼만한 일일 수 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새로운 제도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제도는 실제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에 놓여 있을까?”
“도움이 필요해지는 그 순간, 정말 손 뻗으면 닿는 곳에 있을까?”
노인 정책, 청년 정책, 장애인 정책, 아동 정책… 이렇게 칸을 나누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칸과 칸 사이, 그 사이를 건너는 길을 얼마나 잘 깔아 두었는지는 결국 접근성의 문제다.
나는 그 사이 공간에 ‘생활돌봄’이라는 이름을 붙여 보고 싶다.
누구나, 어느 시기에든, “지금은 조금 기대고 싶다”라는 마음이 들 때, 너무 멀지 않은 곳에서 문 하나 더 열려 있는 동네. 많은 자료 속에서 ‘접근성’이라는 단어에 꽂히게 된 이유는, 언젠가 그런 동네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접근성은 문서 속에서만 다뤄지면 금세 딱딱해진다. 내게는 그 ‘진짜 접근성’의 감각이, 책상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생활의 기억 속에서 먼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