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그네가 가르쳐준 마음

흐릿한 추억이지만 또렷한 기억

by 먼소리뚜버기

‘누구나 닿을 수 있게 만든다’는 말은 거창한 이론이기 전에 몸으로 배운 질서에 가깝다. 나는 그걸 국민학교 운동장 한쪽에서 처음 배웠다.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를 떠올려보면, 학교 본관 건물을 바라보면 왼쪽에는 1·2학년 교실이, 오른쪽에는 3·4학년 교실이 있었다. 본관에는 교무실과 5·6학년 교실이 붙어 있었고, 도서실이었는지 실험실이었는지, 아무튼 책도 있고 뭔가 실험 도구도 있던 교실이 하나 있었다. 전 학년이 한 반씩이라, 학교는 작고 조용했다. 작아서 좋은 점이 있다면, 우리 학교 사람을 다 아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기억이 오래돼 조금 흐릿하지만, 1·2학년 교실의 가장 좋은 점은 왼쪽 출입구를 나가자마자 그네가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놀이기구는 운동장에 있었는데, 가장 높은 위치의 교실 옆에 그네가 있다는 건,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조금 더 멀리 보라고 슬쩍 등을 떠미는 배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네. 지금 생각해도 동선이 너무 완벽했다.”

우리는 쉬는 시간이면 그네를 타기 위해 달려 나갔고 줄을 섰다. 학교에 그네는 딱 하나뿐이었다. 하나뿐이면 자연스럽게 어떤 질서가 생긴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겠는데, 오래 독점하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었다. 오래 타고 있으면 괜히 눈치가 보이고, 어느 순간 내려오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됐다. 줄을 서서 기다리면 언젠가는 내 차례가 왔다.

경쟁도 했다. 누가 더 높이 올라가는지. 그런데 그 경쟁은 “내가 더 오래 타야 이긴다”가 아니라 “내가 더 높이 갔다가 내려오면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에 가까웠다. 그때는 ‘나누는 법’을 따로 배운 기억이 없는데도 그런 식의 나눔이 그냥 생활의 리듬처럼 몸에 배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하나뿐인 공공 놀이기구를 모두가 돌아가며 쓸 수 있도록 우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 낸 작은 규칙이었다.


나는 1970년대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도시의 상황과 촌이었던 우리 동네의 상황은 아주 많이 달랐다. 그때는 그 차이를 ‘차이’라고 부를 줄도 몰랐다. 그냥 그게 내가 사는 세계였으니까. 성인이 되어 직장을 다니고,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니, 가끔 이런 말을 들었다.

“나이가 몇인데 그런 옛날이야기를 하세요?”

그럴 때마다, 내가 발 딛고 선 시간과 다른 사람의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흘러왔다는 걸 실감했다. 누구는 자연스럽게 누리며 자란 것들을, 나는 나중에야 책이나 이야기로 알게 되는 순간도 있었다. 그 간격을 나는 이제 ‘접근성의 차이’라고 부른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무엇에 더 쉽게 닿을 수 있었는지가 우리의 기억을 조금씩 갈라놓는다. 우리 동네는 도시보다 느렸지만,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스스로를 돌보는 법”을 일찍 가르쳐준 곳이기도 했다.

그렇게 그네가 ‘공유’를 가르쳐 주었다면, 교실 안에서는 ‘자립’을 배웠다. 그네를 타고 내려와 흙먼지를 털며 들어간 교실, 4학년 무렵의 실과 시간이 떠오른다. 그날 우리는 ‘의·식·주’라는 세 글자를 배웠다. 그때는 몰랐다. 그 단어들이 훗날 내가 평생 고민하게 될 ‘삶의 기본값’이 될 줄은.


지금도 비슷한 내용을 배우겠지만, 내게는 그때의 ‘의·식·주’가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상하게도 그건 단어 세 개를 외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손에 쥐는 기분이었다.

옷을 단정히 입고, 밥을 골고루 먹고, 집을 깨끗이 정돈하는 것, 너무 소박하다. 소박하지만 그 시절 교과서가 강조한 건 단순한 규칙이라기보다, 생활을 대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이렇게 해라”라기보다는 “이렇게 하는 편이 너를 지켜준다”는 말투였다.

옷차림은 체면보다 먼저 위생과 안전을 떠올리게 했다. 더운 날은 더운 대로, 추운 날은 추운 대로,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는 옷차림이 우선이었다. 그다음에야 타인에 대한 배려, 예절 이야기가 따라왔다. 옷차림이라는 건 결국 나 혼자만 편하자고 입는 옷이 아니라, 함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질서를 만드는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배웠던 것 같다.

식생활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일이 아니었다. 잘 먹는다는 건 무엇을 얼마나 먹느냐만이 아니라, 감사와 절제, 함께 먹는 사람에 대한 배려까지 포함하는 일이라고 들었다. 요즘은 식사 풍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 내게 ‘식사 예절’은 거의 생활의 법처럼 느껴졌다. 젓가락질을 잘해야 한다는 규칙이 아니라, 밥상 앞에서의 마음가짐 같은 것. 고개 숙여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그냥 형식적인 인사는 아니라는 걸 어린 마음에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주(住)'는 내게 가장 역동적으로 다가왔다. 낡은 문을 열어 눅눅한 공기를 밀어내고 새 바람을 들이는 일, 바닥을 쓸고 걸레질하고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일. 어린 나에게 그것은 단순한 집안일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환경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경험이었다.


지금은 의식주가 너무 쉽게 ‘소비’로 번역되곤 한다. 더 좋은 옷, 더 비싼 음식, 더 넓은 집이 곧 더 나은 삶인 것처럼 이야기되기도 한다. 물론 더 나은 조건이 삶을 편하게 해주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 교과서 속 의식주는 반대로, “삶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게 받치는 최소한의 뼈대”에 가까웠다. 몸을 돌보고, 공간을 돌보고, 함께 사는 사람들을 돌보는 습관이 쌓이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삶을 버티게 해준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가끔은, 그네 앞에서 배운 암묵적인 약속과 교과서에서 배운 의식주가 한 줄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독점하지 않는 마음, 기다리면 내 차례가 온다는 믿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생활이 좋아진다는 감각. 잘 사는 법은 멀리 있는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오늘의 식탁과 옷장과 방 한구석을 ‘제대로’ 다루는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

그네에서 배운 ‘기다림’과 교과서가 가르쳐준 ‘단정함’. 어쩌면 접근성이란 제도의 문제이기 전에, 내 차례를 기다릴 줄 알고 나 자신을 소홀히 대하지 않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기본이 흔들리지 않아야, 우리는 비로소 타인에게도 손을 뻗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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