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취리히에서 버킷리스트 지우기

* 유럽여행 24일차 20230609(일)

by 오십아재 싸묵싸묵

* 유럽여행 24일차 20230609(일) 루체른 캠핑장 ~ 취리히 (호텔 웰컴 인)


빈센트 반 고흐의 '사이프레스가 있는 밀밭' (Wheat field with Cypresses) 일부분


루체른 캠핑장에서 세탁하기

루체른 캠핑장에서 풍성한 아침


아침에 새소리와 빗물 소리에 눈을 떴다. 텐트 바닥이 조금 젖었지만, 다행히 밤사이 많은 비는 오지 않아서 무사히 하룻밤을 지낼 수 있었다. 오늘 방문할 도시는 취리히이다. 취리히로 출발하기 전에 밀린 빨래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래서 세탁실로 갔는데 그린델발트 캠핑장의 세탁실에서와 같은 코인 넣는 박스(기계)가 보이질 않았다. '오호~ 여기는 공짜인가?' 하며 세탁기 컨트롤 패널 버튼을 눌러봤다. 아니나 다를까, 마지막 단계에서 카드를 삽입하라는 메시지가 뜨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세탁이 우측 상단에 가늘고 긴 카드 넣는 슬롯이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얼마나 돈 계산이 확실한 친구들인데 공짜일 리가 없지.'


인포메이션 데스크로 찾아가 문의하니 여직원이 카드 구입에 30유로를 내라는 것이었다. 헐~ 다른 캠핑장보다 너무 비싸다고 했더니 여직원이 포스트잇에 무언가를 적어서 자세히 설명해 줬다. 카드 보증금으로 20유로이고 충전금 10유로 해서 합계 30유로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용 후 카드를 반납하고 보증금을 꼭 찾아가라고 강조했다. 오케이~! 그렇게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야 지붕 아래 긴 테이블에서 맛있는 빵과 모닝커피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취리히 미술관에서 버킷리스트 지우기

취리히 미술관 전경
미술관 앞 안내판


취리히 역시 아는 바가 거의 없는 도시였다. 그래서 AI 앱을 통해 가볼 만한 곳을 검색하던 중 취리히 미술관에 모네, 고흐, 샤갈, 피카소 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게 꿈인가? 생신가? 했다. 내가 애호하는 인상파, 후기 인상파 대가들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을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이번 여행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버킷리스트를 지울 기회였다. 나는 서둘러 세탁물을 챙긴 후 1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취리히 미술관으로 향했다.


다음으로는 취리히 미술관에서 마주한 작품들에 대한 간략한 소감을 기록하고자 한다.


모네

건초더미(Haystacks)' 연작 중 하나


모네의 연작으로 유명한 건초더미를 마주하였다. 모네가 동일한 대상이라도 보는 시간대와 시각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 연작 중 하나이다. 추상화의 선구자인 바실리 간딘스키가 이 모네의 건초더미를 보고 충격과 감동을 받아 안전한 법률가와 교수의 길을 버리고 화가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는 일화로도 유명한 작품이다. 빛을 그리는 인상파의 그림답게 건초더미 그림자 경계의 다양한 빛깔의 치열한 터치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수련(Water Lilies) 연작 중 하나
수련(Water Lilies) 연작 중 하나
수련(Water Lilies) 연작 중 하나


다음은 모네가 백내장 눈 수술 후 말년에 그린 대작으로 유명한 '수련'이란 작품으로 큰 벽을 배경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연작 중 3점이나 한 곳에서 볼 수 있다니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역시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연못의 모습을 너무도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보는 이의 마음조차 차분하게 쉼을 얻게 했다. 모네의 수련을 본 것만으로도 이번 유럽 여행의 가치는 차고 넘쳤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


'예술가들의 예술가'라는 빈센트 반 고흐. 우리는 그의 예술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마음의 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자화상 앞에서 더 아련하고 애틋함을 느끼게 된다. 그의 깊고 또렷한 눈동자에서 그 열정을 엿보게 된다.


눈 덮인 밭을 파는 두 농부 여인 (Two Peasant Women Digging in Field with Snow)


평생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고흐였다. 밀레를 존경했던 고흐는 농부들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눈 덮인 밭을 파는 두 농부 여인'에서 밀레의 '만종'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고흐 특유의 터치로 그려낸 '고흐 판 만종' 같은 느낌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사이프레스가 있는 밀밭' (Wheat field with Cypresses)


'사이프레스가 있는 밀밭'은 당대의 사진 같은 회화에서 완전히 벗어나 고흐 자신만의 느낌을 표현해 낸 작품이라 하겠다. 사진으로는 영혼을 담을 수 없기에 고흐는 그림에 살아있는 영혼을 담아 낸듯하다. 몽환적이기까지 한 회오리치는 구름과 생동감 넘치는 터치의 사이프레스, 불타오를 듯한 덤불이 황금 밀밭과 함께 이글거리고 있었다. 영감에 사로잡힌 고흐의 터치가 그대로, 여전히 전해지고 있었다. 보는 이를 끌어당기는 묘한 마력에 사로잡혀 한동안 작품을 떠날 수가 없었다.


지붕고치는 사람
생트마리의 흰 오두막집들 (White Cottages at Saintes-Maries)
모자를 쓴 농부의 얼굴 (Portrait of an Old Man with a Straw Hat)
모자를 쓴 농부의 얼굴


르누아르

르누아르 <소녀>


미술관에서는 르누아르의 대표 작품 중 하나인 '소녀'를 한 전시실에서 단독으로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실 한쪽 벽 가득 파란 천으로 가리고 가운데만 뚫어 '소녀' 작품 하나에만 시선이 집중되도록 장치했다. 2016년 12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특별전 '르누아르의 여인전'을 관람하며 르누아르의 작품을 감상하며 매료되었던 적이 있다. 그때도 한국에서 전시되지 않았던, 직접 보기 힘든 귀중한 작품이었다. 고난은 잠시지만 아름다움은 영원하다고 했던 화가의 말처럼 소녀의 순수하고 청순한 아름다움이 여전히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은 참이었다.


루벤스

루벤스의 <성 어거스틴>


전시실 사이 통로를 지나는데 작은 액자의 그림 한 점이 내 눈을 끌어당겼다. 작지만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스쳤다. 그 그림은 루벤스의 '성 어거스틴'이란 작품이었다. 루벤스 하면 어릴 적 본 명작 동화 '플란다스의 개'가 떠오른다. 그림에 천재적 재주가 있던 주인공 네로가 추위와 허기로 죽어가면서 성당에서 마지막으로 루벤스의 그림을 보면서 행복하게 죽어가는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 감동으로 남아있다. 오랫동안 루벤스의 그림이 얼마나 위대한지 궁금했었는데 오늘 이곳에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그 의문이 풀렸다. 적절한 색상의 농도와 명암의 대비 그리고 역동감을 넘어 신성함까지 어느 것 하나 빠지질 않았다. 그의 작은 작품은 전시실의 많은 걸작들 속에서도 빛이 나고 있었다.


칸딘스키

바실리 칸딘스키 작품
바실리 칸딘스키 작품


러시아의 화가 칸딘스키의 작품을 취리히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인상파 모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색상과 형태로만으로 감정과 인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아직 추상화로 진화하기 전 단계의 작품으로 강렬한 원색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작품을 감상한 것만으로도 이미 입장료는 뽑은 셈이었다.


그 외에도 세잔, 샤갈, 피카소 등의 매력적인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운수 좋은 날이 아니겠는가?


취리히 미술관의 작은 연주회

미술관 중앙홀 무대
미술관에서 열린 음악회


한참 작품 감상에 빠져있는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선율이 계속 들려왔다. 마침 '취리히 아트 주간'으로 미술관에서 특별 관현악 공연을 중앙 홀에서 개최한 것이었다. 이미 거장들의 작품으로 무방비 상태인 감각에 현악기와 피아노의 부드러운 선율은 그대로 머리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예술적 감성의 충만함으로 황홀하기까지 한 순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꼼짝 못 하고 행복감에 눈을 감고 연주를 들었다.


전시실을 옮겨갈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작품을 마주할까 하는 기대감으로, 감동 속에 감탄을 연발하며 미술관을 2바퀴 돌았다. 내 체력과 집중력의 한계가 아쉬울 따름이었다. 막연히 생전 볼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내가 좋아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바로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스위스에서 '얻어걸린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취리히 미술관에서 또 하나의 '황홀한' 버킷리스트를 지울 수 있었다.


내일은 드디어 스위스를 떠나 독일 뮌헨으로 들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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