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여행 10일차 20240526(일) 밀라노
* 유럽여행 10일차 20240526(일) 밀라노
밀라노의 아침
맘껏 잠을 자고 창밖 새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깼다. 여행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숙소에서 여유 있고 편안한 잠을 자서인지 기분이 상쾌했다. 아침 새소리에 동네 산책도 하고 어제 늦어서 못 간 마트도 갈 겸 아파트 현관을 나섰다. 그런데 어제 지오반니와 함께 타고 올라왔던 오래된 기계식 리프트가 작동되질 않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걸어서 내려왔다. 1층 리프트에 고장을 알리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오래된 건물인 건 맞는 것 같았다.
2블록 떨어진 마트를 향해 천천히 거리를 구경하며 완보했다. 거리는 대체로 쓰레기 없이 깨끗했지만 오래된 거리여서 산뜻한 맛은 없었다. 그래도 키 높은 나무에서 우는 새들과 나를 보자 놀라 가로수로 올라가는 청설모를 보며 자연 친화적인 도시라는 인상을 받았다. 마트에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식품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었다. 특히 계란을 4개, 2개씩 포장해서 판매하는 게 재미있었다. 유제품, 계란, 식빵 등을 샀다. 가격은 한국과 비교해도 부담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밀라노 지하철 풍경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밀라노 관광에 나섰다. 솔직히 밀라노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AI 앱이 추천하는 관광 명소 몇 곳을 선정하여 돌아보기로 했다. 일단 밀라노 대표 명소인 대성당으로 가기 위해 감바라역으로 향했다. 전철역은 깨끗했지만 조금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플랫폼과 철길 사이에 보호막은 없었다. 한국 전철에 익숙해져서였을까? 전철이 들어오는데 위협감이 조금 느껴졌다.
전철은 좀 오래됐지만 깨끗했다. 전철 안 사람들은 평온해 보였다. 유모차를 끌고 탄 부부가 대화하는 모습, 큼직한 전동 퀵보드를 갖고 타는 젊은이, 전화 통화에 여념 없는 껄렁한 젊은 친구를 보고 있자니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인지 별로 옆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조금 있으니 한 키 작은 친구가 옆 차량에서 건너오더니 모자를 뒤집어 바닥에 놓은 후 손으로는 남미풍의 작은 기타를 치며 동시에 입으로는 팬플루트를 멋지게 연주하는 것이었다. 적선할려는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밀라노 대성당까지 가는 10여 분이 지루할 틈이 없었다.
신성한 예술의 경지, 밀라노 대성당
밀라노 두오모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하차했다. 전철역 출구 계단을 벗어날 때 나는 적잖게 당황스러웠다. 전철역 출구를 나오자마자 바로 넓은 광장과 함께 밀라노 대성당의 전경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아직 맞이할 마음에 준비가 안 됐는데 갑자기 마주친 연인이랄까? 마법에 끌리듯 대성당 쪽으로 가게 되었다. 역사책에서든 TV에서든 한 번쯤은 보고 들었던 세계 3대 고딕 성당중 하나로 뽑히는 그 성당이다. 지금 그 성당을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삼각 지붕에 기둥마다 쏟은 첨탑을 한 백색의 성당 파사드는 멀리서도 웅장하고도 신성스런 위풍을 풍기고 있었다. 성당 가까이에 가서는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라는 말이 성당에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기둥마다 벽면마다 청동문마다 새겨진 부조의 섬세함과 디테일의 치밀함이 상상을 넘어서는 경지였다. 한 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그 중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을 수종 드는 마리아와 천사들' 조각은 한참을 바라봐도 눈에 담을 수 없는 신성한 예술의 경지였다. 청동 재료를 엿가락 다루듯 하고 석재를 종잇장 다루듯 한 중세 이탈리아 장인들의 신앙심과 솜씨에 정말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성당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많은 관광객과 함께 좌측 회랑을 따라 걸어가며 성당을 관찰했다. 대부분의 성당이 그렇듯 밀라노 성당도 십자가 형태를 하고 있었다. 후면에 다다르니 큰 아치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에 화려하고 우아한 문양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아름다움은 결코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많은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오랜 시간 시행착오를 겪으며 피와 땀과 기도와 합심으로 이루어 낸 결과물이었으리라.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며 한 참 눈 호강을 한 후에 돌아설 수 있었다.
검정색의 재발견, 비토리오 갤러리아
대성당을 돌아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파리의 개선문 같은 묵직하고 멋진 아치형 건물로 발길이 향했다. 건물의 위엄이 마치 고대 로마 황제를 알현하러 들어가는 문 같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거리는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연한 파스텔톤 노란 건물들을 따라 십자 거리가 형성되어 있고 거리 천장은 아치와 돔 형태의 투명한 철골 구조를 통해 자연채광이 내리 비취고 있었다.
연한 노란색 건물을 바탕으로 가로로 줄을 긋듯 둘린 검정색들과 검정색을 배경으로 한 황금색 글씨와 문양들이 너무도 기품 있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검정색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검정색의 재발견이었다. 다양한 색상과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바닥 대리석 모자이크화들도 거리를 걷는 즐거움을 배가시키고 있었다. 샤*,프라*,디오*등 각종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한 이곳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갤러리아' 거리였다.
돌에 진심이었던 로마제국의 후예들
비토리오 갤러리아 거리를 관통해 나오니 스칼라 오페라 극장이 그리 넓지 않은 길 너머에 있었다. 길을 건너려는데 도로 바닥을 포장한 돌판들이 내 눈길을 끌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고대 로마 시대부터 온 유럽의 도로를 포장해 왔던 이탈리아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스칼라 극장 앞 도로 돌판은 대체 얼마나 오래된 것일까? 돌이 마모되어 맨들맨들하게 되어 마치 '인절미 떡 판'을 보는 듯했다.
이미 몇백 년은 사용한 듯한 포장 돌판이 앞으로도 수백 년은 거뜬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해 보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몇백 년, 몇천 년을 내다보고 건축하고 토목 했던 로마제국의 후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밀라노 대성당 부조와 갤러리아 건물과 바닥 모자이크화를 떠올리며 극장 앞 도로를 보고 있자니 '정말 이탈리아 사람들은 돌에 진심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예술의 산실 오페라 극장
지난번 비엔나에서 예약 착오로 이루지 못했던 오페라 하우스 관람을 이곳 스칼라 오페라 극장에서 할 수 있게 됐다. 내부 관람 티켓을 구입하고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널찍한 공간이 나왔다. 바닥은 우드 재질로 마감하고 천장에 멋진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는 극장 로비였다. 금방이라도 옛날 귀족들이 멋진 드레스를 차려입고 기둥 뒤에서 나와 단체로 춤을 출 것 같은 공간이었다. 로비 곳곳에는 유명 음악가들의 석상이 놓여 있었는데 그중에 푸치니와 토스카니니의 흉상이 눈에 들어왔다. 뭐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인 것 같다.
기둥 사이를 지나 좁은 통로를 따라 극장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작은 방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중 몇 개의 방이 개방 되어 있었다. 좁은 방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오페라 극장은 7층으로 된 넓은 원형 공간이었다. '영화에서나 봤던 오페라 극장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면서 이곳저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화려한 문양을 한 방청 객석과 천장의 큰 샹들리에가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공연이 이곳에서 막을 올렸을까? 얼마나 많은 음악가들의 열정이 쏟아졌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감동을 받았을까? '유럽인들에게 오페라 극장은 남다른 애정과 추억이 깃든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성당이 신앙의 성지라면 오페라 극장은 예술의 산실이자 고향이라 하겠다.
너~무 오래된 밀라노
스칼라 오페라 극장을 나와 스포츠체스코 성으로 가기 위해 트램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기다리는 동안 거리를 보고 있자니 극장 바로 옆 거리에 먼지 쌓인 신호등과 녹슬고 비틀어진 표지판 뒤로 휠체어에 의지해 거리를 힘겹게 건너오는 노숙자에 가까운 노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그 모습이 많은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화려한 젊은 날은 지나고 이미 늙어버린(?) 밀라노의 한 단면을 대변한다고나 할까?
밀라노는 대도시이지만 외곽도로 포장이 패인 상태로 방치된 곳이 더러 있었고 슬럼가처럼 쓰레기 쌓인 거리에 검정 톤 옷을 입은 젊은 부랑자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현대화된 건물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고 오래된 건물을 계속 개량해서 사용하고 있는 형편 같았다. 고택을 계속 쓸고 닦아서 이용하면 그 기품은 유지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신선함과 활력을 느끼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스포츠체스코 요새와 후원
아주 빈티지한 노란 트램을 타고 스포츠체스코 성 앞에 내렸다. 묵직한 나무로 된 트램 문이 기계음을 내며 슬로우 모션으로 열리고 닫히는 모습이 테마파크에 와 있는 착각을 일으켰다. '아날로그가 살아 있는' 밀라노라고나 할까?
스포츠체스코 성은 말 그대로 군사 요새였다. 중세 기사가 나오는 동화책에서 읽었던 깊고 넓은 해자가 성을 두르고 있었다.(물은 없음) 그리고 성문 양옆으로 크고 견고해 보이는 방어용 원형 망루가 지키고 서 있었다. 입구를 통과해 마주하게 되는 큰 사각형의 공간 역시 창문이 거의 없는 4층 높이의 높은 성곽으로 둘러있어 '호구'에 들어가는 형국이었다. 성 내부는 화려함이나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삭막한 교도소 같은 분위기였다. 과거 도시국가 간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게 했다. 무엇보다 안전이 가장 우선되어 지어진 성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의 후문을 벗어나니 많은 나무로 우거진 넓은 공원이 펼쳐졌고 많은 시민이 주말을 맞아 평화롭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큰 나무 그늘에도, 햇빛 비치는 풀밭에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거나 아이들과 쟁반 던지기 놀이를 하거나 공놀이하면서 한가로운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 풍경이 사뭇 한국과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첫째로 쫓기는 게 없는 여유랄까? 그런 느긋함과 차분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두 번째 특징은 옆에 사람들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를 따라 나도 나무 그늘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주변 신경 전혀 쓰지 않고 아침에 싸 온 스테이크 샌드위치를 꺼내 편안한 마음으로 점심을 먹었다. 포만감과 함께 평화롭고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기며 한 동안 휴식을 취했다.
조금 일찍 숙소로 돌아와 아침에 장 본 재료들로 맛있는 저녁을 준비했다. 에어비앤비 아파트는 여러모로 편리했다. 침실과 샤워 시설을 단독으로 이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방을 맘껏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신선한 양파, 토마토 등 야채를 곁드린 송아지고기 스테이크와 양상추 쌈으로 풍성한 저녁 식사를 했다. 유럽 여행 10일 만에 밀라노에서 처음 제대로 된 식탁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이탈리아에서 첫날을 무사히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