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쉐보레 스파크, 나를 밝힌 작은 불꽃》1-4

챕터Ⅰ. 작은 불꽃이 켜지던 순간

by 나세진

4. 경차끼리만 아는 ‘끼리끼리’ 감정


불꽃 1호기에 친구를 태우고, 남양주의 두물머리로 간 적이 있다. 서로 지쳐 있던 시기였고, 그저 가만히 물을 바라보는 ‘물멍’이 필요했다. 숨 가쁜 일상에서 잠시 빠져나왔다는 해방감 때문이었을까. 차 안에서는 그동안 미뤄 두었던 세상 사는 이야기가 쉼 없이 오갔다. 작은 공간 속에서도 이야기는 마법처럼 점점 깊이를 더해 갔다. 마치 칵테일 쉐이커를 흔들수록 색이 차분히 섞여 가는 것과 같다.


그러다 자동차 전용 도로에 들어섰다. 1차로를 달리는 스파크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내 불꽃 1호기와 똑같이 생긴 차였다. 나는 그 차의 대각선 뒤, 2차로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이내 1차로의 스파크가 오른쪽 방향지시등을 켰다. 내 앞으로 차로를 변경한다는 신호였다. 이럴 때는 대개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내가 속도를 높여 먼저 지나가는 것. 상대가 정석대로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사이드미러로 내 속도를 가늠한 뒤 진입을 미룰 것이다. 둘째, 내가 속도를 줄여 양보하는 것. 깜빡이를 켠 채 일정한 거리가 유지된다면, 상대는 편하게 들어오면 된다. 급한 일이 없고, 불필요한 긴장을 만들고 싶지 않다면 속 시원히 두 번째 선택지를 택하는 게 낫다.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간단해 보이지만, 어느 쪽이든 상대와의 ‘합’이 잘 맞아야 한다. 운전은 혼자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운전은 교육과 닮았다. 바로 관계의 예술이란 점이다. 너와 나, 둘 중 한 명만 상대의 의중을 제대로 읽지 못해도, 위험은 곧바로 현실이 된다. 대부분 사고는 ‘모호한 태도’, 먼저 가려는 ‘욕심’, 그리고 ‘우왕좌왕하는 행동’에서 빚어진다.


“너 그런데 왜 먼저 안 가? 앞차가 경차라서 일부러 배려한 거야? 허허허.”


상황을 지켜보던 친구가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두 번째 선택지를 택했다. 속도를 약간 줄인 채로 일정한 흐름을 유지했다. ‘편하게 들어오세요’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방향지시등을 켠 스파크는 좀처럼 차로를 바꿀 기미가 없었다. 두 대의 스파크는 한동안 열병식처럼 오와 열의 간격을 맞춰 나란히 주행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했다. 하나는 상대가 끼어들기를 두려워하는 초보 운전자라는 것, 또 하나는 상대 역시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자라면 내가 속도를 내어 먼저 지나가는 게 맞다. 하지만 나는 판단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도로 위에서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흐름이 끊기지 않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내가 애매하게 태도를 바꾸는 지점에서, 우리는 함께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결국 그 스파크가 내 앞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비상등이 짧게 깜빡였다. 그 몇 초 덕분에 마음 한구석이 훈훈하게 데워졌다. 아마 상대도 내 선택을 느꼈을 것이다. 괜히 상대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져 미소가 지어졌다.




문득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정말 경차라서 더 관대해진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경차를 타면서부터 말없이 주고받은 비슷한 장면들이 여럿 떠올랐다.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감정의 교환이었다. 아마 그래서 나는 경차를 조금 더 배려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계속하여 말하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경차가 느끼는 위험은 더 크다. 퇴근길, 신나는 음악에 젖어 흥얼거리던 어느 날이었다. 대형 덤프트럭 한 대가 내게 바싹 붙었다. 손에 진땀이 났다. ‘여기는 우주가 아니다. 더는 도킹을 시도하지 말라!’고 외쳤다. 충돌 후 펼쳐질 광경들을 상상했다. 재빨리 비상등을 깜빡였다. 살고 싶다는 일념이었다.


그럼에도 뒤차는 거리를 좁히며 도킹을 시도했다. 급기야 나는 경적을 요란하게 울렸다. 물론 경적은 뒤차를 향하지 않는다. 앞차는 이유를 몰라 불쾌했을지도 모른다. 오해가 겹쳤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일로를 걸었을 것이다. 그 순간, 자동차 회사에 엉뚱한 옵션을 건의하고 싶었다. 버튼을 누르면 뒤쪽 로고가 열리고, 그 틈새로 공작새가 날개 무늬 속에 “떨어져 주세요. 정말 무섭습니다.”라는 문구가 펼쳐지는 장치였다.


경차라는 옷을 입으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아찔했던 순간의 감각이 더욱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경차 뒤에 설 때면 자연스럽게 안전거리를 넉넉히 둔다. 누가 더 빨리 가느냐, 누가 먼저 끼어드느냐보다,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간격을 만들려 노력한다. 이는 나의 ‘상선약수(上善若水)’ 운전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아마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나 역시 경차 운전자들로부터 무언의 인사와 배려를 여러 번 받았다. 어느새 경차 옆에 나란히 주차만 해도 괜히 반가워진다. 도로 위에서 받은 압박이 분노로 이어지는 대신, 겸손과 배려로 이어진다면 도로의 공기는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워질 것이다.




내가 느낀 무언의 인사말은 이런 것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상하게 덜 낯서네요.”

“아, 지금 당신 차도 RPM이 꽤 올라갔겠군요. 힘내세요!”

“당신도 지금 타이밍 재고 계신 거죠? 괜찮습니다.”

“몰아붙이지 않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인사들은 말이 아니라 속도와 간격, 방향지시등, 주차 매너로 전해졌다. 물론 모두 내 착각일 수도 있다. 경차라서가 아니라, 원래 인격의 품이 넉넉한 사람이 경차를 몰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은 어떤 차를 몰더라도 같은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착각이면 어떠한가.


자기의 속도란 도로 위에서 상대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형식일 수 있다. 경차만의 한계를 체감하며, 같은 속도로 달린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인간적인 연대를 일으키는 언어를 배우는 일이다. 요즘은 사람 사이의 장벽이 높다. 나는 이 문제를 ‘연대감’이란 말로 풀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는 나와 너 사이의 감정의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끈은 갑자기 생기지 않는다. 상대의 언어를 배우는 데서 시작된다.


여전히 많은 지인이 차를 바꾸길 권유한다. 안전이 가장 큰 이유다. 사랑하는 아내는 내가 직장에 잘 도착했는지 거의 매일 묻는다. 차들이 점점 커지는 세상에서, 그 마음이 더욱 이해된다. 언젠가는 나 역시 나의 불꽃 1호기와 헤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차를 타는 동안만큼은, 인정(人情)의 향기를 어렴풋이 맡을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차를 바꾸더라도, 차의 크기나 가격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문화에는 섞이지 않을 것 같다. 감사하게도 이미 ‘경차’라는 언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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