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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세진 Mar 11. 2024

강의식 수업은 좋지 못한가?

프레이리, 루소, 듀이

    어느덧 나도 모르게 어영부영 살다가 나이를 먹게 되었다. 나이를 먹음과 동시에 갖추어야 할 것들이 많음에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상황에 맞물려 연구부장이란 보직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부장 자리를 피해 왔고, 스스로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숨어 지내왔다. 새 학기가 되어 기존에 계시던 부장님들께서 한 번에 다른 학교로 인사이동을 하시는 바람에, 정말 ‘어쩌다가’ 그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연구부장은 교육과정과 장학, 공개수업, 시간표 작성, 교사 학습 공동체 등과 관련된 업무를 맡는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연구부장이 학교 교육과정을 짜고, 학급 담임 선생님들께 안내한다. 쉽게 말해서 선생님들의 교육 활동의 근거가 되는 판을 깔아줘야 하는 일이다. 학교 교육과정이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사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업무는 장학이 아닐까 싶다. 교육과정은 학교의 지향점과 정체성의 표현이며, 장학은 교사의 전문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둘 다 매우 중요한 부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서울대학교 교육연구소에서 집필한 교육학용어사전에 따르면 장학이란, “학습 지도의 개선을 위하여 제공되는 지도·조언(助言)을 비롯하여, 교육활동의 전반에 걸쳐 교육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전문적·기술적 봉사활동 내지 참모활동(參謀活動).”이다. 따라서 장학 일정 속에는 당연히 공개수업이 포함되어 있다. 주로 동료장학과 임상 장학의 유형으로 수업을 공개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전에 수업과 관련하여 여러 선생님이 모여 수업에 대해 협의한다. 신규 때부터 지금까지 동료 선생님들과 모여 협의하면, 선생님들의 생각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교사가 주도하는 지식 전달형 강의 수업보다 학생 중심의 활동 수업이 더 좋은 수업이다.’     

    모든 분은 아니지만, 위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분들이 꽤 많이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당연한 게 아니냐고 받아들일 정도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평소에는 많은 분이 어떤 수업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공개수업의 경우 일방적인 지식 전달형 수업을 하는 분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동료 장학의 경우에는 동료 교사들에게, 학부모 공개수업의 경우는 학부모에게, 임상 장학의 경우에는 교장‧교감 선생님에게 수업을 공개하다 보니, 평소와 달리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리고 지도 및 조언해주시는 교감‧교장 선생님들께서도 학생 중심의 활동 수업을 원하신다. 그래서인지 많은 선생님께서 특정 개념을 설명하는 시간을 줄이고 활동 위주로 수업을 구성하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모둠 수업이 더러 있었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내 학창 시절에서 모둠 수업이란 형태는 찾기가 힘들다. 과목별 선생님들께서는 열심히 교과서의 지식을 강의하시고, 나는 선생님께서 설명하시며 정리하신 내용을 받아적기에 바빴다. 전형적인 지식 전달형 교수‧학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시험을 위해 받아적은 내용을 열심히 암기했다. 이런 형태의 수업 방식에 너무 익숙해져서 친구들과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받았을 때 오히려 당황했고, 그것이 귀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고등학교도 중학교 시절과 비교하여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빚어지는 사회상들 또한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지식 전달 위주의 강의식 수업이 마냥 지루하고 나쁜 수업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시절, 나는 교과 자체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단순히 남들이 공부하니까 어느 정도 따라가야겠다는 마음에 공부한 것이지, 과목 자체가 좋아서 공부한 적은 없었다. 공부를 어느 정도 해놓고 컴퓨터로 달려가 삼국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인생에 큰 반전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갓 입학한 신입생으로서 지내던 어느 날, 고등학교 3년을 허투루 보내면 성인으로 살아야 하는 긴 시간이 굉장히 피곤해질 것이란 계산을 했다.

    당시 철없던 고1의 생각으로 세상을 봤을 때, 학벌보다는 실력 있는 사람을 우대하는 방향으로 세상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지만, 학벌이 아니라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지금 뭔가 머릿속에 넣어 두는 게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 욱여넣다 보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이걸 바탕으로 뭔가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흔히 말하는 명문대학에 입학하면 덤으로 좋지 않겠는가. 실력이 같은 사람이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냈을 때, 출신 대학이 다르다면 심사위원은 그 부분은 고려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중에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공부를 안 해 두어서 못 한다면 조금 후회되지 않겠는가. 어린아이가 찰흙을 가지고 놀 듯이 미래에 관한 생각을 요모조모 주물러 보았다. 그 생각 뒤로 피상적으로 했던 교과 공부를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저 그렇게 느껴졌던 무미건조한 과목 수업에도 집중했다. 어느 날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평소 자장가처럼 따분하게 느껴졌던 역사 선생님의 말씀이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재미있게 들렸다. 마치 성경의 로고스(logos)가 레마(rhema)로 다가와 머리통을 때리며 휘감는 것처럼 묘한 느낌을 받았다. 신라 시대의 상대등과 왕의 정치적 관계를 들었을 때 삼국지에 등장하는 권모술수와 권력의 비정함이 그려지자 귀가 절로 기울여졌다. 역사뿐 아니라 수학, 과학, 국어, 윤리 같은 과목도 마찬가지로 색다른 맛으로 다가왔다. 수학 시간, 무한급수를 설명하며 뼈를 때리는 선생님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무언가가 계속하여 더해짐에도 불구하고 무한히 양이 늘어나지 않고, 어떤 수로 수렴한다는 현상이 너무 신기하지 않냐는 선생님의 말씀에 수학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썩 재밌진 않더라도 자신만의 매력을 은은히 뿜어대는 과목도 있었다. 의식적으로 과목별 매력을 찾으려 노력했다.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니, 어떤 선생님이 수업 준비를 열심히 해오시고, 어떤 선생님이 말주변이 있으며, 어떤 선생님이 태만한 분인지도 파악이 되었다. 강의식 수업 한 차시를 위해서 사전에 공부도 많이 해오시고, 자료도 많이 찾아오시는 선생님들의 숨겨진 노력도 보게 되었다. 그런 수업은 매시간이 알차고, 기대되는 시간으로 변했다. 그리고 한 걸음씩 발맞추어 따라가자 어느덧 실력도 함께 쌓였다. 중요한 건 전부 강의식 수업이었음에도 학문 자체에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정 교과에 대한 실력이 오르면서 유기적으로 다른 교과에 대한 이해도 높아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강의에 재미를 더하는 적절한 위트와 군더더기 없는 명쾌한 설명, 쏙쏙 들어오게 하는 어투와 퍼포먼스가 내 학습 욕구와 연결되어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고 본다.     

    내 경험에만 비추어 강의식 수업은 나쁜 게 아니란 걸 말한다면, 크게 설득력을 얻지 못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일방적인 지식 전달 위주의 수업을 비판한 교육학자와 교육사상가들이 있는데, 그들의 이름은 교육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하!’란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유명한 분들이다. 그분들은 유교의 공자와 맹자처럼 교육 분야에서 학문의 큰 줄기를 이룬 분이라 할 수 있다. 루소, 듀이, 프레이리다. 데이지 크리스토둘루(Daisy Christodoulou)의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에 따르면, 위대한 교육의 고전 반열에 오른 『에밀』에서 루소는 지식 학습은 비효과적이고 비교육적이며,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듀이 역시 지식을 가르치는 건 학생의 자연스러운 성향을 무시하여 수동적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따라서 경험을 강조하고 체험을 통해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레이리는 잘못된 교육 실태를 저축행위에 빗대고, 학생은 예금계좌, 교사는 예탁자에 빗대어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학생에게 ‘입금’하면 학생은 그것을 축적 및 보관하는 일만 할 뿐이라며 지식 전달형 수업을 ‘은행 예금식 수업’이란 비유를 사용하여 신랄히 비판했다. 좋은 수업은 교사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학생들이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도록 안내만 하는 수업이고, 구성주의는 선이고 직접교수법은 악이라는 생각이 상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많은 사람에게 이분들의 사상이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책의 저자는 루소, 듀이, 프레이리가 ‘사실적 지식’과 ‘이해’ 두 측면을 적대적인 관계로 파악한 점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어진 모든 과학적 연구에 따라 틀린 논리라고 한다. 인간의 지능에 관한 연구에서 밝혀진 인지구조 모델에 따라 우리가 장기기억에 저장한 사실적 지식은 인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1) 우리가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업기억과 장기기억을 활용하는데, 작업기억은 제한된 작은 공간이다. 반면 장기기억은 작업기억보다 훨씬 큰 용량을 갖고 있어 수천 개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고 한다. 따라서 장기기억에 저장된 정보를 인지적인 부담 없이 작업기억으로 불러들이면서 작업기억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장기기억에 여러 가지 지식을 저장해 둔다면, 그것들이 작업기억의 능력을 확대하여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적 지식을 학습하는 것이 창의성 등 역량을 개발하는 데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가게 된다. 교육심리학자들이 밝힌 인지구조에 대한 이해가 없더라도 멜번대학교 교수인 존 하티는 『보이는 학습: 학습성취에 관한 800개 문헌 분석 종합』에서 교사 요인과 관련하여 직접 가르치는 방식이 세 번째로 효과적인 것으로 나왔으며, 더 높은 효과를 보인 두 가지 역시 직접 가르치는 것에 포함되거나 관련되는 영역이었다. 교사가 지식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전혀 아니란 것이다.     

    직접교수법은 1960년대 미국 교육학자인 시그프리드 엥겔만에 의해 개발되었다. 당시에 성공을 거두었지만, 듀이, 프레이리의 이론과 모순되는 부분이 있어 논쟁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한국 교육에서 가장 비판받는 점이 지식 전달 위주의 수업이라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루소, 듀이, 프레이리의 이론이 절대적으로 옳은 방향을 제공한다고 믿어 왔었다. 교육대학 재학 중 인상 깊게 읽었던 교육 고전이 루소의 『에밀』이다. 『에밀』에 드러난 루소의 견해는, 책 출간 당시의 사회상에 비추어 굉장히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결국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을 가르치던 나는 수학 교과에 한정하여 제자들을 데리고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강의식 수업으로 한 차시를 전부 진행하는 방식, 한 차시 전부를 지식의 원리를 설명하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 원리를 찾게 하고 탐구 및 실습, 토론하는 방식, 앞에서 기술한 두 가지 방식을 적절히 한 차시에 분배하는 방식. 총 세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학업성취와 학생들의 반응 등 여러 요소를 살피며 장단점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유형 별로 3차시씩 수업을 진행했다. 돌이켜보면 학습자의 성향이란 변인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실험이었다. 장 의존형(field dependent) 성향의 학습자는 동료학습을 선호하고 상호작용이 허용되는 학습 상황에서 더욱 열심히 참여한다. 반면에 장 독립형(field independent) 성향의 학습자는 동료학습보다는 개별학습을 선호하고 교사의 지식 전달형 수업을 더욱 좋아한다. 이런 점을 배제하고 모든 학생이 같은 능력과 집중력을 가졌다고 가정하고 실험하였다. 허술한 점이 분명 있지만, 각 방식에서 장단점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내가 했던 강의식 수업을 살펴보자. 수업 중간에 학생의 질문은 허용되며, 학습자에게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생인 아이들은 설명 위주의 수업은 힘든가 보다. 서서히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루해하거나 수업 내용과 관련 없는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시선은 앞을 보고 있지만, 생각은 딴 곳으로 가 있는 학생도 더러 있었다. 학원에서 미리 해당 차시의 내용을 선행학습한 아이는 더욱 집중하지 못하고 다 안다는 듯이 딴청을 피웠다. 그럴 때마다 목소리에 약간의 카리스마를 담아 근엄한 분위기를 형성하여 집중을 요구했다. 분위기를 환기하는 효과는 확실히 있었다. 집중력이 뛰어나고 학습 태도가 좋은 아이들이 성실히 대답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집중하지 않는 몇몇 학생에게는 일일이 질문하여 끝까지 개념을 이해했는지 물고 늘어졌다. 특히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여 이미 다 안다는 듯이 행동하는 학생을 상대로, 집요하게 질문하여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진실을 일깨웠다. 소크라테스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산파술로 상대방이 무지하다는 걸 일깨웠듯이 나도 비슷하게 흉내를 내보았다. 강의식 수업은 교사가 어느 정도 조용한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효과적으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어서, 학습 태도와 집중력을 강조했다. 이런 식으로 세 차시를 수업하고 평가를 봤다. 학생들은 세 차시 동안 배운 내용을 곧잘 소화했다. 평가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강의식 수업의 장점은 무엇일까. 짧은 시간 동안 여러 가지 지식을 전달할 수 있었고, 설명 위주의 수업이라 수업을 준비하는 부담이 적었다. 그리고 많은 양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하지만 단점 또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단 흥미를 끌기 어렵다. 타고난 성향이 수학과 같은 과목을 좋아하지 않는 학생이 태반이다. 수능 인터넷 강의 속칭 ‘1타 강사’처럼 청산유수로 말하면서 시청각 자료를 동원하여 흥미를 일으켜야 하는데, 그렇게 진행한다고 하더라도 초등학생이 시종일관 40분을 집중하여 귀 기울이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학생마다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달라서 수업 중 학습 태도가 흐트러질 때마다 일일이 지적하다가는 수업의 흐름이 끊길 수 있다. 종종 도깨비가 몽니를 부리듯 투덜대는 아동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휴대전화로 유튜브 쇼츠(shorts) 영상을 많이 봐서인지, 학생들의 집중력이 예전과 비교해 과학적으로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강의식 수업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방식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두 번째 유형은 어떨까. 내가 지식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보다는 학생들 스스로 활동을 통해서 핵심 지식을 발견하도록 세 차시의 수업을 설계했다. 강의식 수업과는 달리 아이들의 번뜩이는 눈과 활발한 몸짓이 되살아났다. 수업과 관련된 내용을 토의할 때는 어느 정도의 시끄러움은 허용했다. 오히려 침체된 분위기보다 활발한 분위기 속에서 토의‧토론을 장려하여 수업을 이끌었다. 원주율을 알아보기 위해서 운동장으로 직접 나가 모둠별로 크기가 다른 원을 그리게 한 뒤, 원주와 지름을 측정시켜 두 항목 사이의 법칙을 발견하게 했다. 모든 수업을 이런 식으로 이끌어 진행했다. 원의 넓이를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넓이를 구하기 위하여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지식은 무엇인지 토론해 보게 하고 서로 가르치도록 하였다. 토의 도중 휴대전화로 필요한 특정 지식을 검색하는 것까지 허용했다.

    이 유형의 가장 큰 장점은 우선 학생들이 즐겁고 지루하지 않게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오감을 사용하여 실험하고, 서로 토의‧토론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방식을 설명하면서 학습하는 형태라 그런지 설명을 듣고 연필만 사용하는 수업보다는 상대적으로 즐겁게 참여한다. 그리고 직접 몸을 통해 익혔기 때문에 기억에도 잘 남는다. 춤 공연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연습 때 열심히 한 동작씩 익혀 모든 춤동작을 완성했지만, 무대에 올라서자 머리가 백지상태로 하얗게 되는 마법 같은 현상이 벌어진다. 막상 음악이 흘러나오면 또다른 마법이 펼쳐진다. 머릿속은 비어있지만, 자신의 동작은 몸이 기억하듯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공자의 유명한 말이 있다.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되나, 직접 해본 것은 이해한다.”라는 말이 와닿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 방식 역시 단점이 있었다. 설명하고 다음 단계로 빨리 넘어갈 수 있는 일까지 설명하지 않고 실험‧실습 방식으로 해결하려니 비효율적이다. 또한 아이들 스스로 깨닫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교사로서 수업을 재구성하는 데도 많은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그리고 토의‧토론을 하여 일반화하는 과정에서는 이미 사교육으로 선행학습이 이루어진 학생들에 의해 교과 내용을 처음 접하여 답을 찾는 학생들이 끌려다니게 되는 때도 있었다. 또한 평소 학습 습관이 잘 잡히지 않았다면, 산만한 분위기로 흘러갈 수 있다.

    세 번째 유형의 수업이 가장 반응이 좋았다는 건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위 두 가지 유형의 장점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교사가 설명해 주어야 할 필수적인 지식은 아동이 이해하기 쉽도록 전달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더욱 발전적으로 실험, 토론, 배운 내용을 익히는 놀이 형태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직접 실험‧실습과 같은 경험을 통해서 익히는 것이 적합한 수업 차시가 있고, 때로는 설명 위주의 학습이 더욱 적합한 수업 차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루소의 교육사상이 담긴 『에밀』은 1762년 루소가 쉰 살 때, 그의 명저 『사회계약론』과 함께 출간되었다고 한다. 당시의 17세기 유럽 교육의 전반적 특징은 루소 관련 연구의 권위자인 윌리엄 보이드에 따르면, “활발한 사변과 무기력한 실제의 대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2) 문법을 머릿속에 욱여넣고, 성경에 나오는 시편 제19장을 암기하고, 암기하지 못하면 체벌이 이루어지는 당시의 유럽 상황에서 루소만이 어린이는 어른의 강요된 지식을 배워야 할 작은 어른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당대의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진 전통적인 교육방식에 용기 내어 맞서 싸웠다. 듀이가 살던 당대, 19~20세기 미국은 산업혁명으로 사회 구조가 격변하는 시기를 마주하고 있었다. 듀이와 동시대를 살던 인물을 살펴보자. 스탠다드 오일(Standard Oil)의 창업자 데이비슨 록펠러,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만 보아도 당시의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듀이가 생각했을 때 사각형 모양의 천편일률적인 교실 속에서 교사가 하는 말을 듣고 앉아 있기만 한다면 개인의 성장과 사회 진보에 이바지하는 교육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비판적 교육철학의 이론가로 분류되는 프레이리의 사례를 살펴보아도 그가 왜 지식 전수를 억압의 도구로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 그가 살았던 당대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피억압자의 교육학’이 원제인 『페다고지』를 펴내어,  ‘의식화’를 통한 인간 해방을 교육자로서의 신념을 담아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일방적 지식 전달 위주의 ‘은행 예금식 교육’ 대신 ‘문제 제기식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대한 교육사상가 존 듀이(왼쪽)와 장 자크 루소(오른쪽)

    이 글은 공부가 부족한 내가 감히 루소, 듀이, 프레이리를 비판하기 위해서 작성한 글이 아니다. 당연히 무분별하고 의미 없는 암기식 수업은 비판받아야 하고, 문제해결 역량 개발을 진정한 교육의 목표로 삼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세 분의 위대한 학자들이 지식 전달 위주의 수업을 비판한 점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들의 살던 시대적 맥락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된다. 단지, 교육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수업 중 교사가 지식을 설명하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걸 말하고 싶다.     

    어떤 수업이 더 나은 수업일까. 이 부분에 있어서 정답은 있을까. 학생 주도형 수업이 무조건 좋은 수업일까. 지식 전달 위주의 강의식 수업은 정말 나쁜 수업일까. 이 문제는 굉장히 어렵다. 임종 전 “좋았어.”라는 말을 남긴 위대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조차 “교육은 인간에게 부과할 수 있는 가장 크고 어려운 문제이다.”라고 했다. 우리 반 6학년 제자들을 데리고 이런 실험을 했을 때가 대략 4~5년 전이었던 것 같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고민과 경험들이 오롯이 머릿속에 남아 맴돈다. 그리고 2023년 올해, 연구부장으로서 신규 선생님들과 함께 임상 장학 사전협의회를 가졌다. 선생님들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제 교직 경력이 8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육자에서 점점 행정가가 되는 느낌이 듭니다. 행정적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해서 매너리즘에 빠져 수업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수업에 있어서는 제가 여러분께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선생님들보다 수업을 더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경력이 많다는 이유로 이 자리에서 감히 코칭을 하기 조심스럽습니다. 그래도 말씀드리자면, 학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개념이 있으면 강의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괜찮다고 봅니다.”



(1)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데이지 크리스토둘루, 페이퍼로드, 2022)의 44쪽 내용을 참고하였습니다.

(2) 『나의 교육 고전 읽기』(정은균, 빨간소금, 2019)의 2장 ‘자연주의 교육과 루소의 에밀’을 참고하였습니다.

(3) 이 글에 나오는 교육 지식은 데이지 크리스토둘루의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의 내용과 정은균의 『나의 교육 고전 읽기』를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지식 전달형 교육이 나쁜 방법이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 미신』을 참고하였고, 29쪽 세 번째 문단의 내용은 『나의 교육 고전 읽기』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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