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아기와 함께 시작하는 영국 생활
3년 하고도 7개월, 일본에서의 생활이 끝났다.
사랑스러웠던 나의 가마쿠라. 그동안 너무 고마웠어.
휴우.
도합 100kg 가까이 되는 캐리어 4개에 아기 유모차, 배낭가방 3개, 마지막으로 아기 기저귀 가방까지 트렁크에 한가득 싣고 나서야 택시 안에서 그나마 한숨을 돌렸다.
국제 이사 마친 다음 날, 16시간 가까이 9개월 된 아기와 비행기에서 사투를 벌이다 보니 이곳이 내가 살던 가마쿠라인지, 런던인지 알아챌 여력도 없었다.
비행기에서도 한숨도 못 잤던 터라 몹시 피곤하였지만 오랜만에 보는 런던이 또 한편으로는 궁금해 감기는 눈꺼풀을 이겨가면서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끼룩, 끼룩.
템즈강 위 다리를 달리는 택시 창문 너머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리가 들렸다. 갈매기였다.
내가 일본에서 살던 마을은 ’ 가마쿠라‘로, 도쿄에서 비교적 가까운 바닷마을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감독한 ’바닷마을 다이어리‘란 영화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집에서 에노덴 전철 선로를 따라 쭉 걸으면 바다가 나와 우리는 곧잘 바닷가로 산책 가곤 했다.
그곳의 바다는 파도의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소리와 서핑보드를 타고 있는 서퍼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보기만 해도 시원한 풍경을 만들지만, 하늘은 조용하다.
제주도로 향하는 배 갑판에서 끼룩끼룩 울던 갈매기에게 새우깡을 주던, 아니, 강탈당하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그곳의 하늘에는 갈매기가 없다.
정확히는 갈매기가 날아다닐 짬이 아니랄까. 왜냐하면 그보다 더 무서운 솔매가 먹이를 노리며 비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솔매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친절한 점원분 덕분이었다. 근처 가게에서 파르페를 사들고 나오는데 점원분이 “매가 낚아 채 갈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라고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던가.
매라고? 뭐라고?
그제야 나는 하늘에 많은 매가 날아다니는 것을 알아챘다. 실제로도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매에게 먹을 것을 빼앗기던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었으니, 점원의 주의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상냥한 조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조용하지만 냉혹한 가마쿠라의 하늘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템즈강 근처서 갈매기가 우는 것이 너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바다에서는 매가 날고, 강에서는 갈매기가 난다니.
한국의 바다에만 익숙한 사람에게 이 이야길 한다면 마치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까.
나의 외국 생활은 이와 같았다. 상식을 의심해야만 했고, 편견은 버렸어야만 했다.
그렇게 일본에서 나는 한국이라는 좁은 생각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는 점이 나에겐 복이었으나, 런던에 온 지 삼일 째 되는 지금. 과연 복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즐거움에 매료된 나와 일본이라는 땅에서 10년을 넘게 산 남편의 무료함이 콜라보레이션 되어 런던 주재원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는데,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아, 잘못 생각했다.’
하면서 후회가 물씬 올라왔다. 생각과 달리 다양한, 다문화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나에겐 공포로 다가온 것이다.
영국식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 언어의 장벽이 클 것만 예상하고 있었는데, 저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려야만 할 것 생각하니 취준생 때도 잘 오던 잠이 오지 않는다.
여행으로 왔을 때와는 다른 감각.
런던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 사람들과 어우러져야만 한다는 경각심.
지금 머물고 있는 임시 숙소도 템즈강과 가까운지 창문만 열면 갈매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 노래가 마치 귀곡성처럼 들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삼일 째 되는 오늘도 시차적응하지 못한 아기를 핑계 삼아 숙소에 콕 박혀 걱정 속에 파묻힌다.
벌써부터 가마쿠라의 바다와 하늘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