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오브워크래프트' 현실 소환 프로젝트
1. 시그니엘 탈피
결혼 준비를 하다 보면 판에 박힌 장면들을 마주한다. 프러포즈의 성지는 시그니엘의 한강 뷰, 명품백, 꽃길, 그리고 "Will You Marry Me?" 풍선.
물론 너무 예쁘고 나도 받으면 잠실이 떠나가랴 오열과 대성통곡을 할 것이다. 하지만 풍경은 같은데 거기에 누구든 끼워넣기만 하면 된다는 점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업무에서도 가장 싫은 것이 '레퍼런스 그대로 베끼기'인데,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를 남들과 같은 콘텐츠로 채우고 싶지 않았다. 프로포즈 주체에 대해서도 말하려면 말할 수 있는데, 나는 누군가가 해주길 기다리는 성격이 못 된다. 여자가 해준다 남자가 해준다가 특별한 건 아니다. (사실 이미 "여자가 하는 프로포즈"라는 키워드도 구려진 느낌... 마치 세상엔 이미 홀로 여행 가는 여성들이 수두룩 빽빽에 남자들보다 많은데도 여자혼자 세계여행! 이름을 단 콘텐츠 같달까.) 연애 때부터 늘 호언장담했다. 내가 판을 제대로 짜서 보여주겠노라고. 기획과 사랑을 지독히 담아서 너에게 바칠래.
2. 이미 혼인신고는 마쳤지만
사실 우리는 2024년 12월에 이미 혼인신고를 마쳤다. 법적으로는 이미 빼박(?) 부부다.
"이미 결혼했는데 무슨 프러포즈야?" 라고 할 수도 있다. 명분이 약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필요했다. 결혼식이라는 보여주기식 행사 이전에, 우리 둘만의 '출정식' 같은 것이. 단순히 "결혼해 줄래?"라고 묻는 청혼이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인생이라는 긴 게임을 나와 함께 잘 헤쳐나가 보자"는 굳은 결의(콘셉트명: 잘 살아보세)를 다지는 의식이 필요했다.
3. 주제는: 현업 게임 vs 인생 게임
가장 큰 고민은 '테마'였다. 그는 게임 기획자다. 처음엔 그가 현재 현업에서 만들고 있는 게임을 테마로 할까 치열하게 고민했다. 나 역시 그 게임을 플레이해 봐서 이해도가 높고, 그의 노고가 담긴 프로젝트니까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깊이 파고들어 보니, 정답은 따로 있었다. 바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 MMORPG의 대중화를 이끈 게임, 사회 문화 현상이 된 게임, 밈까지 수두룩한 바로 그 블리자드 대표작. 지금의 일이 아닌, 그의 와저씨 인생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딱이었다. (그런데 와저씨라기엔 이미 한참 예전에 그 게임을 끊기는 했다 삶이 바쁘다 보니...) 학창 시절 그가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가장 뜨겁게 열과 성을 쏟아부었던 세계관이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웃고 울었던 그 '순수한 열정'의 시절을 리스펙해주고 싶었다. 지금의 '게임 기획자'가 있게 한 뿌리가 바로 그곳이니까. 방향성은 정해졌다. 단순한 청혼보다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현실로 소환해 주기로.
나는 이 소중한 와우 덕후를 위해 100GB가 넘어서 다 깔면 노트북이 조금 무거워질 듯한 게임도 받고, 한 시간 동안 플레이를 하면서 이 게임의 분위기, 디자인, 스토리 등을 깨우쳤다. 초보다 보니 튜토리얼 과정은 험난했다. 협업이 중요한 게임이라고 들었는데 그가 이걸 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니 그렇게 재미없지는 않았다. 물론 동시에 나무위키로 데스크리서치도 했다. 그는 성기사. 나는 바바리안 정도로 해석할까? 하는 재미가 있었다.
4. 공간은 어디?
콘텐츠가 정해졌으니 장소를 정할 차례. 내가 선택한 곳은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이다. 이유는 단순하지만 명확했다. 최근 읽었던 책 <나는 브랜딩을 호텔에서 배웠다>에 나오는 반얀트리의 창업 스토리가 좋았다.
화려함보다는 '영혼의 안식처'를 지향한다는 그 확고한 철학이 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인 로망도 한 스푼 들어갔다.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저기는 대체 어떤 사람들이 가는 걸까?" 하며 올려다보기만 했었다. 가난했던 학생 신분으로는 꿈도 못 꿀 곳이었지만, 이제는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그리고 새로운 시작이라는 명분으로) 그 문을 열어보고 싶었다.
물론 로망 실현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1박에 100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불가능으로 슬퍼하는 대신 당근마켓을 켰고, 잠복 끝에 원가보다 훨씬 저렴하게 바우처를 득템했다. 분위기를 띄워줄 조명과 소소한 소품들도 전부 '쿨거래'로 해결. 아껴서 다른 곳에도 쓸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선물이라든지? 클럽룸의 풀 디럭스 룸을 골랐고 이게 여기서 얼마나 좋은 급인지는 모르지만, 반얀트리는 각 층에 방이 몇 개 없다는 얘기는 들었고.. 그럼 기본적으로 방은 다 좋겠지 뭐.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진행... 반얀트리 창업자, 믿습니다.
기획과 장소 세팅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그 공간을 채울 콘텐츠와 그를 이 무대로 이끌어낼 '초대장'을 만드는 일.
단순한 카톡 메시지로는 부족했다. 나는 회사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코딩 지식에 AI의 힘을 빌려 퀘스트창이라고 쓰고 프로포즈 웹사이트라고 부르는 것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본 게임(반얀트리)으로 입장하기 전, 플레이어(남편)의 몰입감을 높여줄 거대한 서문! 개발자가 아닌 기획자가, 어떻게 깃허브까지 파서 그럴싸한 퀘스트 창을 구현했는지 다음 편에서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