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그래도 아직 목숨은 붙어있잖아.

19년 06월 03일

by Sankim




잠에서 깼다.

피곤했던 몸이 엄청 개운하다. 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빛은 기분 좋게 방안을 비춘다. 저 멀리서 바람을 타고 온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온다. 평화롭다. 그리고 바로 직감했다. 망했다. 이거 늦잠이다.




딱 한 시간 더 잣는데 이렇게 몸이 개운할 수 있다니. 출근시간마저도 훌쩍 지나버린 시간에 깼다. 여기 와서 처음으로 늦잠을 잤지만 한두 번 늦어본 솜씨가 아닌 듯이 능숙하게 교장에게 늦잠 자서 죄송하다고 곧 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이미 와장창 늦어버린 거 좀 여유로워졌다. 지금 가도 늦을 거 샤워도 하고 머리도 말리고 버릴 쓰레기도 챙겨서 나왔다.


30분 늦으나 한 시간 늦으나 늦은 건 매한가지 똑같다. 다시는 늦으면 안 되겠지만 망치고 나면 도리여 마음이 편해지는 게 있다. 그림 그릴 때나 글 쓸 때 완전히 망쳐 버렸을 때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한 획 한 글자 조심히 적지만 와장창 망해버린 순간부터 망설임이 없어진다. 지금 내 글도 그렇다. 브런치 작가에 한번 떨어지고 나니 망설일 것이 없어졌다. 그냥 쓱쓱 적을 거다. 다 망했다. 와장창.


KakaoTalk_20190910_215452248.jpg 교장실에 걸려있는 아인슈타인 그림. 매번 내게 말을 건다.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똥멍충아" 라고.




이번 주는 망한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이곳에 온지도 한 달이 지났다. 한 달이라는 시간은 쳇바퀴에 들어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매일 같은 일상이 되어버리니 심심하고 적적하고 도망치고도 싶고 새로운 걸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 주는 두둥! "친구 사귀기 대 프로젝트의 주 week"로 정했다. 아직 스페인어도 못하고 영어도 잘하는 척하는 수준이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에 근처 UIS라고 하는 대학교로 향했다. 내가 근무하는 Damaso zapata 학교와 UIS 대학교는 벽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형제 학교다. 하나는 여기서 제일 오래된 Colegio(학교). 하나는 여기서 제일 오래된 대학교. 그러나 나를 대하는 분위기는 정 반대다.


먼저 우리 학교 Damaso zapata에서는 나는 유명인사다. 진짜 하루에 10번도 넘게 학생들이 "싼티아고!"라고 말하며 쫓아온다. 맨날 하는 대화는 거기서 거기 이지만 사람이 5천 명이나 있으니 매일 다른 아이들이 나를 둘러싼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마음이 이런 마음일까. 특히 어린 애일수록 더 맹렬히 쫓아온다. "아뇨하쎄요" 라는 어색한 한국말을 하며 쫓아오는데 진짜 귀엽다. 심장에 해로운 녀석들이다.


KakaoTalk_20190910_215454597.jpg 내가 사는 부까라망가는 시골 아닌데.. 닭이 산다. 저 길을 지날 때면 무서워서 멀리 빙돌아간다.




그러나 UIS에서는 인기가 없다. 끔찍하게도 없다. Damaso zapata에서 거의 슈퍼스타급의 인기를 누리다가 UIS에 오면 좀 서운해진다. 그냥 신기한 동물, 예를 들자면 도심에 나타난 고릴라 같은 걸 보듯 힐끗힐끗 쳐다본다. 그리고 내가 말 걸까 봐 약간 두려워하는 눈빛도 있는 거 같다. 한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잘 보기 힘든 흑인이 다닌다면 이렇게 쳐다볼까? 신기해서 힐끗힐끗 보게는 되지만 말을 하는 것 까진 부담스러운 정도. 그래도 가서 말을 걸면 잘 말해준다. 착한 학생들이다. 학교에서 흑인이 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면, 아니 걸려는 뉘앙스만 보여도 혹시라도 영어로 물어볼까봐 전력질주로 도망가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다 이해한다.


친구 사귀기의 첫 단계는 말 걸어주길 바라면서 벤치에 앉아있기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보이는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쓱 웃으니 같이 웃어주는 사람들도 많았다. 느낌이 좋았다. 말만 걸어주면 내가 그 사람을 평생 친구로서 최선을 다하겠다 마음을 먹었지만 그런 행운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어쩌다 한번씩 내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면 이상한 종교이야기를 하면서 전도하는 사람들, 혹은 큰 도넛 박스를 들고 도넛 먹을 생각 없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말을 걸어주겠지 싶었지만 그렇게 고독하게 책 한 권을 홀딱 읽었다.


그렇게 이삼일이 지나니 이제 내가 말을 걸어야지 싶었다. 혼자 다니고 착해 보이면서 너무 어둡지 않은 사람. 주로 혼자 밥 먹는 사람한테 쓱 가서 카페테리아가 어디냐고 물어보며 접근했다. 착해서 다들 알려줬지만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바쁘거나 혹은 밥 먹는데 너무 열정적이거나 혹은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다. 나름 3달 공부해서 스페인어 좀 한다 생각했던 자만심은 두동각 낫다. 이런 언어 잼병으로는 더 이상 친구 사귀기는 글렀다 싶었다.


친구 사귀기 대 프로젝트는 망했다. 쫄딱 망했다. 성과라고는 책 한 권과 엄청난 일조량 정도. "과외선생님을 구해서 친구 먹기 프로젝트 대작전" 작전으로 작전상 후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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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IS 대학교는 참 좋다. 왜냐하면 1000원짜리 저 과일 샐러드와 아무 곳이나 누울 수 있는 공간과 이쁜 정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전부다 우리 기관에는 없는 것들이다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 머리일까? 배꼽일까? 심장일까? 이 사람이 뭔 소리를 하고 싶기에 이런 소릴 하는 걸까? 싶을 거다. 내가 아팠다는 소리를 하려고 밑밥을 까는 거다. 나는 몸에 아픈 부위가 몸의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서 배가 아프다면 배가 몸의 중심이다. 왜냐하면 먼저, 모든 신경과 관심이 배에 쏠린다. 그리고 배가 아프면 배만 고장 나는 게 아니라 온 몸이 고장 난다. 식은땀도 괜히 나고 잘 걷지도 못한다.


지금 나의 몸의 중심은 머리가 되었다. 정확히는 왼쪽 뒷골과 목 왼쪽 뒤쪽. 거기에 온 정신과 신경이 쏠려있다. 오랜 기간 거북목으로 있던 나의 목은 드디어 콜롬비아에서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퍼져버렸다. 드디어 혹사당하다가 파업(Paro)을 일으켜 버렸다.


해외 나와서 아프면 진짜 너무 서럽다. 해외에서 아팠던 기억 중 가장 끔찍했던 기억은 파리에서 앓았던 감기다. 때는 내가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교회 형 동생들과 함께 한 달간의 유럽여행을 떠났다. 마지막 일정이었던 파리. 열씸히 파리를 헤집고 돌아온 어느 날 저녁에 머리가 땃땃해 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그렇게 아팠다면 그냥 감기인가 보다 넘겼겠지만 그때의 파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때 유럽에 에볼라가 상륙했다는 뉴스가 한창 뉴스 1면을 장식할 때였기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감기와 에볼라 바이러스의 초기 증상이 유사했다. 누워서 한참을 네이버에 "에볼라 바이러스 증상"을 검색한 이후 난 생각했다. "아 여기서 죽는가 보다. 여행으로 왔다가 파리에서 묻힐 운명이 될 줄 몰랐구나. 영화 명량도 못 보고 죽는구나. 썩 괜찮은 인생이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혼자 격리된 방에서 지지리 진상을 떨었다. 그리고 다음날 멀쩡히 나았다.




이번 주 내내 목이 너무 아팠다. 진통제를 먹었는데도 죽을 거 같았다. 진통제를 안 먹으면 누군가 계속 신경에 이쑤시개로 콕콕 찔러보는 듯한 느낌이다. 아픈 뒷목을 부여잡으며 반성했다. 뒷목을 혹사시킨 나의 컴퓨터 습관, 핸드폰 습관을 탓했다.


긴 밤. 생각이 많은 밤. 아파서 잠 못 들던 그 밤은 검색할 시간이 많았다. 아픈 증상들을 조합해보니 네이버는 나보고 목디스크라고 한다. 이 먼길 콜롬비아 와서 목디스크에 걸리다니. 이러다 목 아래 몸이 전부 마비가 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이 증상이 더 심해져서 눈 깜빡이는 걸로 의사소통해야 되는 건 아닐까.


쓸데없고 가혹할 정도로 끔찍한 걱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나는 이리저리 휩쓸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 같았고 너무 헛되게 살았고 난 이제 눈만 깜빡일 수 있는 사람이 곧 될 거 같았다. 그리고 지금은 씻은 듯 나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약점이나 아픈 곳은 사람의 중심이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집중하게 되고 모든 것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걱정의 파도는 모든 걸 삼킬 듯 하지만 지나면 안다. 찻잔 속의 폭풍이었다는 걸. 그래서 건강해야 하고 그래서 마음이 단단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래서 뭐, 어떻게 되겠어?" 하는 조금의 낙관주의도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목 스트레칭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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