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쎈쓰 ssence Jul 19. 2016

다시 봐도 '그랑블루'

어쩌면 심해보다 더 깊은 건 우정뿐

'뤽 베송 감독' 하면 연관 검색어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레옹'일 것이다. 물론 국내에서는 이를 모티브 삼아 만든 노래로 한층 더 이슈화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Léon'보다 먼저 나온 'Le Grand Bleu(1988)'를 개인적으로 감독의 최고 작품으로 꼽는다. 이는 물론, 어렸을 때부터 방 한 쪽면을 '그블루' 포스터로 차지했을 만큼 영화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진 탓도 있다. 특히 자크의 티 없는 순수함 그리고 이를 어른이 될 때까지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자크보다는 엔조의 삶이 더 부럽게 느껴진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갖고, 남들의 인정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에 갈 때까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 노력. 그리고 노력한 만큼 일에 있어서는 자존심을 지켜내는 그런 삶이 요즘따라 해내기 어렵기에 더욱더 이상적으로 다가온다.


어렸을 때 장면은 흑백 처리 함으로써 현실과 대비를 준다.


어렸을 적에, 자크와 엔조는 한 동네 살았었다. 물론 국적은 서로 다르지만, 둘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잠수다. 솔직히 영화를 다시 보기 전, 난 당연히 그들이 바다를 좋아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잠수, 즉, 다이빙을 사랑한다. 엔조는 자신이 잠수로는 세계 1위지만 어렸을 때부터 내심 느꼈던 자크에 대한 경쟁의식 그리고 자격지심을 회복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큰돈을 벌자마자 마음속 경쟁자인 자크를 찾아 나선다.



엔조에게 자크는 경쟁자이자 둘도 없는 친구다. 그를 그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자크뿐일 것이다. 잠수, 바다 그리고 죽음마저 동행할 수 있는 하나뿐인 친구이자 자신의 기록을 가뿐히 깨내는 원수. 물론 자크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자크에게 엔조는 심해에서 다시 올라올 수 있게 주는 이유일 수도 있다. 가족이라고는 돌고래와 귀가 심하게 안 들리는 루이 삼촌뿐인 그에게 진정으로 '사람 사는 세계'로 데리고 나온 이가 엔조다. 그런 그아무것도 모르는 자크에게 여자, 술, 그리고 자존심까지 가르쳐 준 아버지 같은 스승이자 친구인 셈이다. 특히 뒤늦게 엔조가 자크 앞에 나타나서 시합 신청을 했을 때, 반가움도 잠시 자크가 망설였던 건 어렸을 때부터 그와 잘 지내고 싶은 마음에 언제든 엔조에게 최상의 자리를 내어준 기억이 크게 작용되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이성으로서 설렘을 느끼게 해 준 조안나가 떠났을 때도 그의 곁에는 엔조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엔조가 죽었을 때의 상실감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크게 다가온 것이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처럼.  



자크, 네 말이 맞았어. 밑이 더 아름답더군. 그러니 날 밑으로 보내주게.


엔조의 마지막 말은 자크를 슬프게 했다. 여태까지 그들이 바다 밖으로 나와야 할 이유를 마련해주었던 엔조가 오히려 바다 밑을 선택했다. 그는 끝까지 잠수를 택한 것이다. 결국 자크를 나오게끔 설득시키기보다 그의 말에 수긍하게 된 셈이다. 물론 엔조는 죽음을 예감했고, 그렇기에 자신을 밑으로 보내달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살기 위해 잠수를 포기하기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끝까지 노력한 그는 결론적으로는 바다 밑을 선택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가 가진 잠수에 대한 자긍심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을 것이다. 그걸 더 잘 알기에 자크는 그를 다시 바다 밑으로 내려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이 둘을 볼 때마다 항상 모차르트와 살리에르가 생각났다. 물론 엔조의 배포는 살리에르보다 훨씬 더 바다 같지만.



조안나는 자크를 또 다른 의미에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준 인물이다. 비록 어린아이 같이 순수한 부분이 그녀를 미국에서 다시 그의 품으로 돌아오게끔 만든 것이지만, 때론 그의 맑디 맑은 영혼이 그녀를 지치게 만든다. '가족'이라는 개념 안에 돌고래 사진 하나를 보여주는 남자에게 모성애를 느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엔조가 그녀에게 경고했듯이 그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이를 알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가 바다가 아닌 자신을 선택해주길 간절히 원했다. 감독판에서 그녀의 이야기가 더 세세하게 나온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 입장에서 봤을 때 자크는 최악의 남자다. 비록 모든 걸 버리고 달려온 그녀지만, 항상 바다 속으로 숨어 버리는 그가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소통이 불가할 때는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자크가 조안나를 만난 후, 아주 조금이나마 성장했을 수도 있다. 물론, 그에게 생소한 사랑이라는 느낌을 알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지만, 어찌됐든 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그를 변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혹은 감정은 아니었다. 그걸 조안나도 알고 있기에 그를 놓아준 것일 수도 있다.



가장 힘든 건 바다 맨 밑에 있을 때야.
다시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


자크는 알아봐야 할 것이 있다며 오밤중에 갑자기 바다 속으로 내려가려고 한다. 그때 조안나가 울부짖으며 자신이 있는 여기가 현실이고, 바다 밑은 춥고 어둡고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바다 밑을 선택한다. 이는 엔조의 결론과도 같다. 그가 그렇게도 알고 싶어했던 것은 얼핏 봤던 돌고래의 행방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하는 돌고래는 무엇인가? 이는 곧 자크를 의미한다. 그와 유일하게 소통 가능한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우린 알아챌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자크에게 엔조가 없는 세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과 같다. 그의 유일한 가족은 돌고래, 즉 자신뿐인 것이다. 다시 뭍으로 올라가야 할 이가 없어진 상태에서 그는 공허함에 못 이겨 결국 바다 밑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에게 있어 사랑보다 우정이 더 깊었던 것이다.



같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유럽 그리고 국내에 조금씩 다른 러닝 타임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엔딩에서의 차이점도 유럽과 미국 영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유럽판에서는 자크가 돌고래를 보고 따라갔을까? 하는 의문점을 제기할 수 있게끔 만들었으나 미국판에서는 빼도 박도 못하게 그가 따라갔음을 입증해 준다.


Le Grand Bleu 유럽판 엔딩
개인적으로 유럽판 엔딩을 더 선호한다. 무언가 스토리적인 요소에서 더 진한 여운을 주면서 그가 그렇게 내려가야만 했던 이유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고 오로지 그만 알 수 있는 수수께끼로 남겨두고 싶었다.


The Big Blue 미국판 엔딩
아름다운 걸로 따지자면 절경을 보여준 미국판 엔딩일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어린이 영화 '프리 윌리(Free Willy)'처럼 둘이 멀어지는 모습이 자크가 바다 밑을 누비면서 만끽하는 자유로움보다는 그저 어느 사람처럼 바다를 헤엄치는 느낌이 더 강하다. 그래서 그저 가시적인 아름다움만이 느껴진다.


감독은 장 르노의 또 다른 매력을 알아볼 수 있게끔 기회를 제공해준다. '레옹'에서 마틸다만 바라보는 어리숙하지만 잔인한 어른이 아닌 '그랑블루'에서의 엔조로 유쾌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어른다운 면을 보여준다. 또한 '자크'로 나오는 장마르크 바의 연기는 언제나 봐도 감동적이다. 어떻게 저렇게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잘 연기해내는지 알 수 없다. 그의 눈만 봐도 영혼이 맑아질 것만 같은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돌고래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의 몸놀림은 상당히 '자크'스럽다. 7월 25일 '블루'라는 주제에 맞춰 감독판으로 재개봉한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데몰리션', 자아 성찰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