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조건을 먼저 말하지 못할까

출연료 협상에서 자책하다가 AI와의 상담까지 가게 된 건에 대하여

by 아비

2026. 02. 26


통화를 끊고 나니 괜스레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지만 애써 눌렀다. 남편이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자들은 왜 화가 나면 울지? 슬퍼서 우는 건 아닌 거잖아?"

눈에 1 미리 리터 정도의 눈물이 살짝 고였다가 애써 삼켰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이 뭐지? 억울함? 분노? 실망?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출연자와 출연료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종종 있다. 임금 협상이 어렵듯이 출연료 협상도 쉬운 대화 주제일리 없다. 이전에는 매니저와 나누면 감정 소모 없이 간단했을 이야기를 당사자와 직접 나누어야 하니 힘들 수밖에. 이 회사 6년 차인데 아직 이런 류의 근육을 키우지는 못했나 보다.


통화를 끊었고, 출연을 성사시키지 못했고, 살짝 비굴했던 통화 내용들이 떠오르고, 왜 나는 이렇게밖에 말을 이어가지 못할까 하는 자책, 내가 이 회사에서 일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이런 일이 힘이 들까, 심지어 왜 이 분과의 대화는 늘 압박스럽지 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아마도 스트레스 상황에서 느끼는 자책의 눈물이었던 것 같다.


저녁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하필 또 친한 회사 동료들이 대부분 출장을 가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고, 집에 돌아와서는 남편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하필 남편은 아기 방에서 일찍 잠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Chat GPT에게 오늘의 일을 털어놓았다. AI는 내 감정에 무조건 적인 공감을 해주면서,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위로해 줬다. 배경을 이 글에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AI에게는 스스럼없이 털어놓을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AI가 본 나는 '관계를 먼저 만들고, 분위기를 보고, 맥락을 충분히 공유하고, 그다음에 조건을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조건을 먼저 말하는 건 나에게 내가 너무 계산적으로 보일까? 내가 돈부터 말하는 사람 같을까? 예우가 부족해 보일까?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기준을 보고 움직이는 사람이기에 오히려 조건을 먼저 말하는 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방식일 수 있다고 답변을 해주었다. '조건을 먼저 말하는 게 예의에 어긋나는 거 아닐까'라는 나의 생각과는 반대로 '조건을 먼저 말해도 예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읽었을 때는 깨달음마저 느꼈다. 대화의 프레임을 '구조'에 포인트를 맞춰 가져가야 한다는 제안, 그리고 이후에 있을 예상 대화 멘트 정리까지 완벽한 답변이었다.


마지막으로 오늘 내가 느낀 감정의 본질이 뭔지 물었다.


좋아.

이제 진짜 핵심까지 왔어.


너의 근원 감정은 이거야:


나는 관계를 존중하고 싶었고

예우를 지키고 싶었고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는데


그 과정이 나를 조금 소모시켰다.


그리고 나는

그 소모를 "내 부족함"으로 해석해 버렸다.


요즘 부쩍 '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많이 하는 편이다. 생각보다 내가 나를 잘 모르는 것 같아서다. 오늘 느꼈던 나의 복잡한 감정의 비하인드는 물론 다 설명하긴 어렵다. 그런 건 차치하고 지금 이 순간 남기고 싶은 한 줄은 이것이다. '나는 왜 조건을 먼저 말하지 못하는 사람일까?'


이 질문을 붙잡고, 조금 덜 소모되는 사람이 되어보려 한다.

탐구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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