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데없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고민
2025.12.11
오랜만에 글을 쓰고 싶어서 브런치에 방문했는데 직전 글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만, 무려 5년 전이다. 심지어 그 사이 나에게 있었던 일을 아주 짧게 요약하자면 방송국에서 게임 회사로 (생명 연장을 했다고 글을 쓴 지 고작 3달 만에) 이직을 했고 딸아이를 출산하였다. 내 삶에 가장 큰 변화들이 있었지만 '내가 일을 잘하고 있나?'라는 고민은 여전하다. 일이 곧 나 자신을 보여주고 증명한다는 생각으로 십 수년을 지내왔기에 이 질문이 곧 나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일 수밖에.
회사 연말 행사가 있었던 날이다. 직장 최고 인기 연중행사인 사내 게임 리그가 열린 하루였다. 5명이 한 팀이 되어 10여 개의 조가 경쟁하여 최고의 우승자를 가리는 행사다. 게임 회사에서 게임을 가장 잘한다는 칭호를 받는 것은 최고의 명예이자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올해도 어김없이 최강자들이 탄생하였다. 반면 누군가는 패배를 아쉬워하며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가 이 행사의 끝인 듯했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진 사람들이 저녁 식사를 하고 삼삼 오오 모여 왜 졌는지 드래프트 과정부터 연습, 본 경기까지 반복 또 반복해서 분석하고 '내가 이랬다면'이라는 가정으로 또 다른 세계선을 써보기까지 하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육아 때문에 아쉽게도 이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 나는 그저 이들을 바라보며 '정말 게임이 진심인 사람들이다'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집에 오는 택시 안에서 많은 생각이 스쳤다. 대화에 끼지 못하고 그저 듣기밖에 할 수 없었던 아쉬움이 가장 컸고 한편으로는 도르마무처럼 결승 장면들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잔뜩 신나 있는 그들과 나는 다른 종류의 사람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니지! '그런 것 같았다'가 아니라 '그렇다'가 맞는 표현일지도?
얼마 전 한 사이트에서 재미있는 아티클을 읽은 적이 있다. <게임 회사 인터뷰 실패기>라는 제목의 에세이였는데, 읽다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회사 이야기가 아닌가! 그 글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They(the company) need you to be a gamer. Does that sound like you?" 글 쓴 이는 왕년에 삼국지 게임도 하고 버블버블도 했던 자신이 게이머지 누가 게이머겠느냐 생각하고 야심 차게 이력서를 냈다. 참고로 우리 회사는 면접이 까다롭기로 유명한데, 이력서를 내고 통과가 되면 인사팀 면접, 부서장 면접을 거치고 이후에는 4명의 임원과 개별 면접을 한 시간씩 진행해야 한다. 그야말로 철저한 검증의 시간들을 이겨내야 한다. 면접을 하기 전에는 게임에서 30 레벨을 달성해야만 했는데 특히나 그 과정이 재미있고 현실함 있게 묘사되어 있었다. 난생처음 PC방도 가고, 음성 채팅도 해보고, AI 봇과도 싸우고, 마침내 랭크 게임에 들어가 사람과 대결을 할 수 있게 됐지만 같은 팀 동료들에게 욕만 잔뜩 먹었다는 웃픈 일화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born gamer'가 아니라며 최종 면접에서 탈락을 했다고 한다. 어쩜 내 경험과 이리 비슷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그때 합격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렇다면 그 '까다로운' 면접들을 통과한 나는 'born gamer'일까?
내 주요 업무는 우리 회사의 게임으로 진행하는 프로 리그를 중심으로 한 영상물을 기획, 제작하는 일이다. 중학교 때 잠깐, 그리고 대학 시절에는 꽤나 자주 스타크래프트를 플레이하곤 했었는데 비록 그룹 랭크였을지라도 골드를 찍어본 경험이 있었기에 '우리 회사 게임은 못 해도 게이머 기질은 있는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었다. 첫 회사에서의 음악 PD, 예능 PD 경력을 살려 리그의 오프닝 세리머니 연출과 다양한 숄더 콘텐츠를 수년째 만들고 있기는 하다. 어떤 콘텐츠들은 큰 사랑을 받기도 했고 어떤 콘텐츠들은 싸늘하게 외면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게임 업계 출신이 아닌 나로서는 우리의 매운맛 고객님들을 백 프로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많다. 알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다. 마치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기분처럼 불편하고 찝찝하기도 하다. 오늘 같은 게임 대회에서도 마찬가지로 고작 몇 년 이 게임을 플레이한 경험으로는 동료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어느 자리이건 끼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기에 이런 상황이 벽처럼 느껴져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이다.
다 내가 극복해야 하는 지점들이다. 이제는 이곳에서의 모습이 곧 나의 정체성이기에 좌절감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이 일을 하면서 짜릿한 도파민을 맛봤던 순간도 있었고 동료들과의 소중한 추억들도 제법 쌓였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이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지 고민은 하게 되지만 그저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 하고 후회 없도록 일을 할 뿐이다. 그리고 한 발자국씩 앞으로 전진해오고 있다고 믿는다. 남들보다는 조금 느릴지언정. 직장인이 된 지 16년 차가 돼가지만 일을 잘하고 싶고, 회사에서 인정받고 싶고은 마음만큼은 여전히 진심이다. 내가 게이머건 아니 건간에 계속해서 작은 돌을 던지고 미미한 파장이라고 일으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