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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소식 Jan 24. 2021

30대, 어떻게 하면 덜 망할 것인가에 대한 고찰

일 년쯤 늦은 블로그 대이동

진리처럼 믿었던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요)'가, '이생망망망망망' 식으로 백 세 시대 평균 수명을 꽉 채워 성실하게 망할 거라는 걸 알아챈 서늘한 심정으로 브런치 첫 글을 쓴다. "뜻하지 않게 맞딱드린 30대, 어떻게 하면 덜 망할 것인가?"가 이 브런치의 주제인 셈이다. (이생망망망망망 표현은 아래 발췌한 책에서 인용)


이 이야기를 하려면, 재작년 말에서 작년 초 다녀온 태국 여행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2020년의 첫 시작을 태국의 작은 바다마을 '라일레이'에서 맞이할 때만해도 서른과 삼십대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20대를 마무리하는 여행지로 어디가 좋을까? 라고 물었을 때, 연말에 몰린 업무에 쩌들어 별다른 생각이 없던 다른 둘과 달리 주연은 강력히 라일레이를 밀었다.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면서 여행 회사 다니는 친구의 추천이니 믿고 가보자는 대책없는 결정은 그 해 여름 발간된 김연수의 신작 에세이 <시절일기>에서의 워딩으로 완성되었다.


배 출발 직전에 픽업해온 피피섬의 아름다운 수제버거를 뜯어 먹으며 발견한 라일레이의 비밀. '영원한 여름에 이르는 법'
정말로 영원한 여름이 깃들어 있는 섬이었다
해변을 돌아다니는 사나운 원숭이들을 구경하며 일광욕을 즐기는 오후
무슨 사연이었는지 태극기가 가장 크게 걸려 있었던 바나나 바와, 멀쩡한 상태로 보고는 헛웃음이 나왔던 숙소 풀의 아침 풍경
29살, 떠나가는 이십대를 기리며 남긴 세 여인의 셀카
2020년의 마지막 선셋과 우리들


피크닉 매트는 커녕 마땅히 깔고 앉을만한 겉옷도 없는 채라 서로의 무릎을 베개 삼아 삼각형 형태로 누워 있는 식으로 시간을 흥청망청 보내던 20대의 마지막. 그런 바보같은 우리에게 선물이라도 주듯, 태어나서 본 선셋 중 가장 멋진 것을 봤고, 마을 규모 대비 그랜드했던 카운트다운 행사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전혀 기대도 못했던 상태에서 까만 밤 하늘에 팡팡 터지는 불꽃 놀이를 보고 마음이 뭉클해졌는지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서른을 맞으면서는 이런 글을 쓰기도 했다.

(...) 돌아보면 욕망-좌절을 여러번 왕복한 끝에, 삶이 원하는 걸 좀처럼 들어주지 않는다는 걸 학습한 20대였다. 거기서 배운 건, 포기하는 태도나 맞서 싸우는 만용이 아니고,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욕망하는 지혜였다. 그러다보면 한번씩 서프라이즈! 하며 나쁘지않게 살아왔다는 사인처럼 기대하지 않은 반짝반짝한 순간이 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원한 여름, 영원한 스물 아홉을 여기 라일레이에 비밀처럼 남겨두고 떠난다. 어쩐지 좀 더 근사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https://blog.naver.com/poignant_s/221756229961


'20대 잘 견뎌낸 나 자신 멋져' 정서가 잔뜩 담겨있는 글. 이 정서에서 얻어맞듯 금방 벗어난 이유는, 그 이후로 펼쳐진 30살이 아주 개똥망이었다는데에 있다. 아홉수에는 액운이 낀다던데, 이쯤되면 부모가 출생신고를 일년 정도씩 잘못한 게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모두에게 험난한 해였다. (물론 코로나라는 절대 강적이 있었고) 때아닌 우울증에 시달린다거나, 만날 때도 재수없던 새끼가 끝까지 재수 없는 새끼인게 매스 미디어에 보도되거나, 직장을 잃을뻔 한다거나....


그리고 어엇, 하는 사이에 서른 하나를 마주한 연초의 내가 있다. 새해 첫 주말엔 수원에 내려가 예원, 주연과 함께 '새해 빙고 챌린지'를 했다. 3 곱하기 3 아홉 칸에 새해에 이루고 싶은 것을 적고, 가장 먼저 혹은 가장 많이 달성한 사람이 이기는 룰을 가진 챌린지였다. 가만히 한 해를 돌아보고 앞으로를 기대하며,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덧 채워진 아홉 칸을 보며 '지난 날의 나와 단절하고 싶은 강한 욕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변화들은 계속 가져가고자 하는 욕망'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업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이만하면 됐다는 마음일 거고, 400km를 달리겠다는 마음은 계속해보겠다는 의지겠지. 아무튼 새해 빙고의 기록용 툴로 쓰기로 한 '노션'을 만나면서 그 욕망은 폭발하고 말았고... 단절이자 연속의 상징으로, 14년 간 운영했던 네이버 블로그를 두고 브런치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노션 사랑해! 2021년 잘 부탁해 + 14주년을 맞이한 네이버 블로그, 약 2100개 포스트가 있다.


농담처럼 말하던 '서른되기 전에 죽어야지'도 실패한 마당에, 나를 잘 다독이고 돌보면서 보내는 십년을 기록해봐야겠다. 새로운 공간에 새로운 이야기를 담다보면 단절도 연속도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쌓여가지 않을까. 게으름 피우지말고 1년 전에 시작했다면 좋았을 것을.... 어떻게 1년이나 미룰 수 있지 싶어 얘를 데리고 어떻게 또 십년을 살아갈까 싶지만, 아무튼 단절과 연속의 의미 값은 딱 떨어지지 않는 애매한 나이인 마흔 하나에 살펴보는 것으로 하자.


마지막으로 작년 서른 맞이 태국 여행 중에 읽었던 김미월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해설 발췌로 첫 글은 마무리. 결국엔 '그래봤자'인 이야기들이겠지만, 뜻하지 않게 "어떻게 하면 덜 망할 것인가?"의 답들을 발견해가길 바라면서.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볼 때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을 더 아쉬워한다고 한다. 하지 않은 일은 미지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가능성은 '하지 않은 일' 쪽에 남아 있는 것이 되고, 그럼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건 간에 정답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타고난 '꽝손'이라 꽝을 집어온 게 아니라, 우리의 선택이 곧 '꽝'이 된다는 얘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간은 그리 미련하지만은 않아서 삶이 내놓는 선택형 문제에 반복해서 속다보면 이래도 저래도 망하는 게 인생이라는, 그리 절망적이지도 않은 담담한 경험적 진리에 도달한다. 생에 대한 열정과 의욕이 사그라들고 좌절과 절망 같은 감정의 동요도 다소 귀찮아질 때쯤엔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은 '그래봤자'라는 부사어를 매개로 등가가 되는 것이다. (중략)

김미월 <옛 애인의 선물 바자회> 해설 중 (이지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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