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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쓰지 Jun 18. 2020

대기업 숫자쟁이의 1일 공포증

그들이 온다, 결산.

  1일 공포증이라는 것이 있다. 재경부서에서는 매월 결산을 하는데, 결산기간이 바로 차월의 첫 주이다. 결산은 쉽게 하려면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고, 준비가 안되어있으면 충분히 어렵게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실적이 나오는 이 기간에는 일을 개판으로 하고 집에 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매월 1일이 되기 전까지 모든 재경부서는 마감 준비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한다.


결산이란 무엇일까

결산이란 매월 사업부 단위, 글로벌 지역단위, 회사단위, 더 나아가 자회사를 포함한 연결 단위로  회사의 경영실적을 산출하는 과정을 뜻한다. 결산은 한마디로 월간 재무제표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결산이 시작되면 차례로 매출 마감부터 시작해서 제품별 수익성 산출까지 수백 명의 인원과 엄청난 규모의 시스템에 의해 마감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만들어진 재무제표로 주주 등 이해관계자에게 3개월마다 분기 보고서, 6개월마다 반기 보고서, 12개월마다 사업 보고서를 공시한다.

이렇게 할 일이 태산이다 보니 결산은 하루 만에 끝날 수 없다. 회사마다 결산 마감기간이 다르기는 하지만 평균 1주일 정도의 기간이 걸린다. 한 달이 4주라고 치면 1/4은 벌써 업무 스케줄이 정해진 것이다.

결산은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전산화되어있고, 동시에 많은 부분이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문제의 뿌리는 사람이 결산정보를 생성한다는 데에 있다. BOM(Bill of Material), WO(Work Order), 비용 분개 등 결산에 필수적인 모든 정보들은 현업에서 사람이 시스템으로 작성을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은 항상 틀린 부분이 생기는 법. 그때마다 재경에서는 마감 단계별로 이상치가 있는 값을 찾아내고 수정해주면서 결산을 진행한다.

결산의 특징은

1) 모든 정보를  알아야 한다
   수상한 입출고 내역은 없는지, 계정이 부적절한 건 아닌지, 가공비가 한 아이템에 지나치게 직과 된 건 아닌지, 거의 똑같은 아이템인데 두 아이템의 ST(Standard Time)가 너무 크게 차이 나는 게 아닌지 모든 정보를 다 알아야 결산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느끼는 바이지만 사업부의 업무는 재경이라는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사업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결산을 할 수가 없다. 문과를 전공한 사람들은 회계적인 부분은 이해를 빠르게 하는데, 사업 아이템이나 구성에 대한 부분은 이해를 빠르게 하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그래서 요즘 재경 조직은 이과를 전공한 사람들을 환영한다.

2)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도와준다
   이 시기에는 일이 너무 많고 예민한 숫자들을 다루다 보니 하루만 해도 피로감이 엄청나다. 재경직군 사람들이 서로를 빨리 집에 보내주려면 협업을 잘해야 한다. 사업부에서 마감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것 같으면 회계팀에서 도와주고, 사업부도 어려운 점이 있으면 빨리 SOS를 쳐야 서로를 빨리 가정으로 돌려보내 줄 수 있다. 서로 내 일이 바빠서 못 도와주네, 마네 하는 순간 모두의 새벽 퇴근은 기정사실화 되는 것이다.

3) 높으신 분들의 잦은 방문
   첫째도 실적, 둘째도 실적. 사기업에서는 높으신 분들의 자리 유지 및 인센티브를 실적이 결정한다. 결산 기간 내내 내 커피를 들고 어슬렁 거리시면서 실시간으로 실적을 관망하고 있는 그분들을 볼 수 있다. 웬만큼 정확하지 않으면 실적 예측에 대한 말을 아끼자. 그분들 귀에 ‘이번 달 실적 잘 나왔습니다’라는 한마디가 들리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4) 갑자기 영어가 유창해짐
  해외법인의 실적까지 챙겨야 사업부 단위 실적을 산출할 수 있다. 높으신 분들이 내 옆에 자리를 깔고 앉으셔서 시시각각 변하는 손익을 보고 계신데, “해외사업장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서 손익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나는 그때가 되면 간절한 마음으로 메일을 쓴다. 하이. 하우 이즈 더 클로징 고잉 온? 해외법인의 실적이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게 되면 나는 망하니까. 내가 이렇게 영어를 잘했나 할 정도로 메일이 술술 써진다.


결산은 어렵다. 20년 동안 결산을 해도 아직도 결산을 다 모르겠다고 하는 선임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 수많은 로직과 과정들을 이해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내가 지금 다 아는 것처럼 써놨지만 나도 결산을 잘 모른다. 10년만 더 해보고 나서 다시 글을 써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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