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교복 치맛자락이 아직 몸에 익지 않아 손끝이 자꾸만 그 주변을 맴돌았다. 낯선 교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텁텁한 공기. 익숙한 얼굴 하나 없다는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의자와 책상, 교탁까지도 비슷한 모양새를 지키고 있는데 그 사이를 가득 채운 사람들은 전부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괜히 조심스레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발을 들여놓았고 부끄러운 내 마음을 감추기 위해 빈자리를 찾는 척 하염없이 두리번거렸다. 어색함이라는 건 참 사람 눈에 잘 띄기 마련이라 시선을 허공에 헤매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나와 같은 시선과 딱 맞부딪쳤다. 잠깐의 눈 맞춤으로도 이 낯선 공간에 나 혼자라는 느낌이 조금 옅어지는 듯했다. 어색함을 잔뜩 끌어안은 채로 묘한 끌림에 조금씩 무게를 더해가기 시작했다.
새 노트가 가방 안에 들어있어도 괜히 너의 앞으로 가 노트를 찢어달라고 했다. 너는 아무렇지 않게 건네줬고 나는 그 순간이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좋아하지도 않던 음료수를 너와 함께 마시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꾸역꾸역 마셨던 날들도 있었다. 너는 그게 가장 맛있다고 했고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입맛을 바꾸었다. 운동장 위로 비추는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파란색이 좋다는 말을 건넸다. 푸른 바다 같아서 마음이 편해진다고. 그 순간부터 파란색은 나에게도 가장 좋아하는 색이 되었다. 너를 닮고 싶다는 마음은 그렇게 나의 작은 일상 속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특별한 말을 더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머물며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서로에게 익숙하지 않은 어색함은 분명 존재했지만 어느새 점점 무뎌져 갔다. 고등학교 3년을 나란히 걸었고 가까운 위치의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함께였다. 수업이 끝나면 자주 가는 단골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었고 미팅이 있다며 들뜬 표정으로 서로의 화장을 해주기도 옷을 골라주기도 했다. 첫 남자친구가 생겼다며 수줍게 웃는 너에게 진심 어린 포옹을 하며 함께 행복을 나누기도 했다. 주말이면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났다. 열차에 나란히 앉아 샌드위치와 김밥을 나눠 먹으며 낯선 도시의 골목에서 새로운 경험을 나눠 가지기도 했다. 우리는 늘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열어 이력서를 쓰는 그 순간까지도 말이다. 전날 집 앞에서 하루 종일 떠들어 놓고도 기어코 면접시험장 앞까지 따라가 청심환을 건네며 “너 아니면 누가 붙어.”라는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잔뜩 긴장을 머금고 들어가던 하나가 밝게 웃으며 나오는 순간 다른 하나는 눈물을 머금고 안도하던 날들이 이어졌다.
내가 너였고 네가 나였다.
결국 각자 바라던 길로 들어섰고 지독하게 추웠던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는 날보다 연락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보지 않다 마주 않게 되었을 때 어색함은 한 스푼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공백도 우리 사이에는 껴들 수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차가운 복숭아 아이스티 두 잔을 앞에 두고 평범한 날들을 이야기했다. 일과 사람 관계에 익숙해졌을 때 오랫동안 꿈꿔왔던 여행을 떠났다. 잔잔한 파도 소리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따사로운 햇살이 머리칼을 가득 차오르는 순간 너를 바라보았다. 까만 단발머리였던 너의 머리는 밝은 오렌지빛이 도는 긴 머리가 되어있었고 늘 바짝 깎던 손톱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예전보다 진해진 이목구비와 성숙해진 분위기가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너만은 내 안에 잔잔하게 머물러 있길.
그런 날이 있다. 여느 때처럼 웃고 떠들며 별일 아닌 이야기를 늘어놓던. 집으로 향하는 길에 문득 오늘이 마지막처럼 느껴졌다. 무슨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이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란 느낌이 아주 조용하면서 확실하게 마음 한편에 내려앉았다. 우리는 10년 넘게 가장 친한 친구라는 명찰을 달고 있었는데. 서로의 계절을 다 지나왔고 누구보다 많은 것을 나누었던 사이였는데. 그렇게 깊게 오랫동안 이어졌던 관계도 끝날 때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연락은 점차 뜸해졌고 사소한 이야기조차 건네기 어려운 사이가 되었다.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공백이 다가왔다. 누군가 나에게 “요즘 그 친구랑 어떻게 지내?”라고 묻는다면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모르겠다는 대답이 목구멍을 힘겹게 지나쳐 나왔다. 마음 구석 어딘가가 저릿해졌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며 느꼈던 감정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니 평생 잊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무 일이 없던 하루였지만 돌아보면 우리가 함께한 마지막 장면이었다.
벚꽃이 잔뜩 쏟아지던 따스한 봄에서 모든 것이 잊힐 만큼 차가운 겨울이 되었다. 지나간 시간만큼 나의 일상은 많이 달라졌고 네가 없는 나날들에 익숙해질 무렵 너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너의 까만 눈동자 안에 나의 얼굴이 가득 차오를 때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함께였던 우리가 가득 새겨진 익숙한 거리 한복판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아무런 손짓 없이 천천히 지나쳤다. 점점 작아지는 추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 잠시라도 겹쳤던 시간에 마음이 요동치듯 울렸다. 네 일상에 내가 없는 것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지만 서로를 향한 마음까지 사라지진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의 계절에 함께할 수는 없겠지만 멀리서라도 가장 환하게 웃고 있을 미소를 바란다. 여리고 착한 마음이 상처받고 무너지지 않길 바란다. 문뜩 떠오르는 기억들에 아파하지 않길 바란다. 우리의 시간은 분명히 끝났지만 진심이 아니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랑할 것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눈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나날을 응원하는 마음일 것이다. 미련해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정의할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너에게도 나는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영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서 작은 순간들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시간의 흐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그래서일까 돌아보면 후회로 남는 것들이 참 많다. 말하지 못했던 마음들과 놓쳐버린 순간들. 그래서 더 깊이 아파했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감정 끝에 남는 건 결국 하나였다. 소중했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그렇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