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꽁냥 Oct 19. 2016

친애하는 니꼴렛

끝끝내 이해할 수 없었던 당신

친애하는 니꼴렛     



글쎄, 펜을 든 이 순간에도 이 답장 아닌 답장을 당신에게 정말로 보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어쨌든, 당신 이름을 한 번 써보고 싶었어. ‘친애하는’이라는, 정중하고 예의 바르면서도 약간의 거리를 두는 이 단어 뒤에 말이야. 우린 늘 그런 거치적거리는 절차를 생략해왔지만, 마지막이니만큼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서, 일정 거리를 두고, 그렇게 당신을 불러보는 걸 해봐서 나쁠 건 없잖아. 뭐, 소리 내서 부르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우선, 당신 추측은 틀렸어. 나는 그 오래된 내 파자마를 입고 있지도 않고 – 그 옷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퍽 유감스러워 – 잠이 덜 깬 눈을 비비고 있지도 않지. 늦잠을 자는 바람에 눈꼽만 겨우 떼고 달려 나가기 바빴거든. 요리사란 직업의 장점은, 모자를 늘 써야 한다는 거야. 직장에서 모자를 쓰고 있어도 아무도 당신이 머리를 이틀 동안 감지 않았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지. 어쨌든, 나는 오늘 아침 너무 정신이 없었고, 당신 역시 지각이라 너무 바빠서 그대로 출근한 거라 생각했었어. 그리고 집에 돌아오니 편지가 덩그라니 놓여있네. 와우. 서프라이즈? 원래라면 달팽이에서 추출한 성분이 주름을 펴준다고 하는, 이름을 외우는 시도조차 엄두가 안 나는, 어쩌구 저쩌구 수분크림이 있던 자리에 말이야. 흠,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어.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당신이 오늘 아침에 남긴 편지를 나는 지금에야 읽고 있단 거지. 밤 열시 반, 언제나처럼, 레몬을 짜 넣은 맥주와 철 지난 유행가를 흥얼거리고 있는 지금에서야 말이야. 웃기지 않아? 내가 볼 때, 이 상황이 우리가 처해 있던 문제적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데, 뭐, 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이 에메필에 비유한 우리 관계는, 글쎄, 내 생각엔 김 빠진 맥주? 혼자 술 먹는 건 알콜 중독의 초기 단계 증상이라고 내게 타박을 주던 당신은 맥주에 대한 내 애정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맥주를 사랑하듯 당신을 사랑했어. 필요와 애정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마냥 좋았지. 당신과 맥주, 둘 다. 그렇지만 김 빠진 맥주라니, 적고 보니 굉장히 슬픈 비유네. 다른 말로 하자면, 음, 적당한 무심함이 문제였던 거 같아. 정정할게. 지나쳐버린―적당한―무심함이 옳은 표현인 것 같아. 말이 안 되네. 지나쳐버린―적당한―무심함이라니.      


그렇지만, 들어봐, 거품 없는 맥주라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맥주에서 거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0이여서도 안 되고 10이여서도 안 돼―전문가들에 따르면, 이상적인 비율은 2:8이야. 내가 당신에게 가져야 했던 무심함이 0이여서도 안 되고 10이여서도 안 되었던 것처럼. 내가 당신에게 8만큼 관심을 가지고, 2만큼 무관심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야. 7:3이여도 나쁘진 않지. 하지만 내 무심함은 0에서 시작해서 차근차근 10으로 올라갔어. 마치 맥주를 먹으면 배가 나오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이야.     


그래, 맥주를 먹으면 배가 나오지. 이건 너무나도 명백한 인과 관계야.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당신을 이해하는 것, 그 둘 사이 관계가 딱 저만큼만 분명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때 나는 당신을 너무나 열렬히 사랑해서, 정말 그래서, 당신을 이해할 만큼 무심하지 못했어. 그럴 수가 없었단 말이야! 하지만 어느 순간, 더디지만 확실하게, 내 무심함은 10에 도달해버렸고, 그리고 그 순간, 당신과 난 김 빠진 맥주가 되어버렸어. 내가 당신 편지를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구절이 뭔 줄 알아, 당신? 놀랐냐고 묻고 아닐 거라고 덧붙였던 구절이 가장 마음 아팠어. 당신이 그 편지를 쓸 때 어떤 구절이 가장 슬펐는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알 일 없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구절이 우리가 헤어진다는 사실보다도 더 슬펐던 거 같아. 왜냐면 내가 예감했던 걸, 당신 역시 예감했고, 우린 노력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아무 쓸모가 없었다는 게 드러났으니까.   

   

내 아랫배를 콕콕 찌르면서 이건 절대 안 빠진다고 놀리던 당신에게 맥주를 위해서라면, 그 정돈 기꺼이 감수할 수 있으리라고 호기롭게 말했던 것처럼 나는 당신이 빠져나간 내 일상과 습관을 감당해내야겠지. 그리고 그게 좀 더 수월할 수 있게끔, 당신 오늘 하루 만에 당신 물건을 죄다 빼갔더라. 어찌나 고마운지. 하지만 당신 말이야. 좀 더 제대로 했어야지. 당신 자리였던 내 침대 왼쪽도 떼어가고, 아침마다 당신이 장난치던 머리카락도 몇 줌 뽑아가고, 이왕 그러는 김에 반지 자국이 남은 왼손 네 번째 손가락 – 그런데 이게 없으면 요리할 때 불편하겠지.- 그리고, 아니야, 오, 젠장, 여기서 멈출게.     


당신을 이해하는 것에 끝끝내 실패한,

판초.


작가의 이전글 판초, 자기, 안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