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을 통한 또 다른 나 찾기
김영하 작가의 <호출>은 1996년, 『문학동네』, 여름호에 발표된 작품이다. <호출>은 소설가 지망생인 남자가 지하철에서 묘령의 여인을 만나고 그녀에게 자신의 호출기(삐삐)를 건네는 것에서 시작된다. 전달하고 전달 된, 호출기를 두고 ‘호출하는 자’와 ‘호출을 기다리는 자’의 상황이 서술되면서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소설은 총 세 개의 장(플롯)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장은 남자의 시선으로, 지하철에서 만난 여자에 대한 상상이다. 두 번째 장은 여자의 시선으로 그려지는데 여자는 남자의 상상과 꼭 닮은 삶을 살고 있다. 여자도 자신에게 호출기를 건넨 남자에 대해 상상을 하는데 현실의 남자와 똑같은 사람을 상상한다. 세 번째 장은 남자가 여자에게 드디어 호출을 하는 것이다. 그 호출은 남자의 집,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울리고 있다는 것을 남자는 깨닫는다. 남자는 자신이 여자에게 호출기를 전달하려고 했던 순간 그녀에게 돌아서 버렸음을 기억해 낸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남자의 상상이었던 것으로 덮어진다. 하지만 그의 방에 걸려 있던 달력 속의 여자가 ‘낯익어’ 보이는 것은 아마 그 여자가 상상 속의 그녀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완전한 환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1장과 2장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상상한다. 스스로가 상상한 인물을 서로 좋아한다. 현실에서는 거부당하고 무시당하고 외면받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남자는 자신의 애인에게서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버림받았고, 여자는 자신이 대역 배우라는 이유로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았다.
하지만 남자가 상상하는 환상의 여자는 대역 배우의 삶을 살고 있었고, 그녀는 수지보다 더 나은 존재로 그에게 인식된다. 그리고 그는 왠지 자신을 “떠난 수지보다는 어제의 그녀가 내 기질에 훨씬 더 잘 맞으리라는 예감”(p.41)을 받는다. 그는 그녀가 대역 배우로 살게 된 이유가 “몸매와 얼굴은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답지만 때를 만나지 못”(p.43)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바깥으로 보이는 여자의 모습과 위치를 떠나 그녀의 진정한 가능성을 알아봐주고 인정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녀 또한 남자를 소설가 지망생으로 상상하며 그런 그의 모습을 좋아한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지금 호출하지 않는 이유가 소설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그가 소설을 다 완성할 때까지 기다려 준다. 그녀는 남자가 돈벌이가 되지 않는 글을 쓴다는 이유로 여자친구에게 버림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녀는 떠나버린 수지와는 다르게 자신이 “거짓으로 강간 당해 번 돈으로 그에게 술을 사”(p.56) 주고자 한다.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 떳떳하게 자신이 번 돈으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사주지 못했지만(직업에 대한 거짓말을 했음) 그에게 만큼은 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 돈으로 술을 사주었을 때 내가 번 돈의 가치를 알아주고 술의 깊이 만큼 자신을 위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외된 자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그들의 내면의 깊음과 보이지 않는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 주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남자의 상상이었다는 점과 둘 사이를 연결해 줄 수 있는 매개체가 호출기라는점에서 두 사람이 진정한 상처 치유가 되었을 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먼저 호출기의 특성이 일방향적인 소통 매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자는 자신의 호출기를 여자에게 주면서 여자가 오로지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여자는 남자에게 연락할 수 없고 ‘호출을 기다리는 자’가 되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남자가 우위(폭력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또 서로가 앞에서 서술되었던 1장과 2장의 이야기가 진정한 자신의 모습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봐 주는 사람이 생겼지만 그것이 남자의 상상이었다는 점에서 고민의 해소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하지만 고민이 전혀 해소되지 못했다고는 할 수 없다. 호출기가 일방향적인 매개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달되었을 때 두 사람은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또 남자의 태도에서도 희망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남자는 자신이 ‘호출하는 자’가 되었음에도 그 지위를 남용하지 않았다. 도입부에서 ‘아마도 지금쯤이면 그녀는 잠들어 있을 때이고, 그러니 내 호출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p.35)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남자는 여자를 호출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는 두 가지 심리를 찾아낼 수 있는데 하나는 그녀를 배려하는 따뜻한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또다시 거부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남자는 여자가 수지와는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그녀도 그런 사람일까봐 걱정하는 마음이 내면에 깃들어있다. 이런 모습은 여자에게서도 나타나는데 여자는 남자가 “자신이 정사 장면만 대신해 주는 대역배우라고 말해도 떠나지 않을 것 같”(p.51)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는 이유가 “그녀를 만나 환상이 깨어지면 소설을 완성하지 못할까봐”라고 생각하며 그가 자신을 진정으로 인정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을 의심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런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씁쓸한 이유는 이 모든 것이 남자의 상상이었다는 점에서다. 남자는 자신의 환상 속에서도 누군가를 확실하게 믿지 못한다. 또 환상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여자를 배려해 마음껏 호출도 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환상을 통해 여자로 변환된 또 다른 나를 만들어 내고 그 여자를 사랑해 줌으로써 자기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 주고자 했던 모습을 찾아낼 수 있기도 하다.
결말에 남자는 용기를 내서 여자에게 호출을 한다. 이는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자 했던 남자의 의지 실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호출기가 자신의 집에서 울리면서 이것이 좌절되고 남자는 “삐삐를 통해 호출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결국 나 자신뿐”(p.58)이라고 말한다. 이는 결국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고 나 자신과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남자가 상상을 통해 만들어낸 그녀가 ‘나’의 분신과도 같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남자는 그녀와의 소통에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이 타인과의 소통이 아니라는 점에서 진정한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지만 남자는 환상을 통해 스스로 어느 정도의 상처 치유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달력 속에 여인이 낯이 익은 것으로 볼 때 상상 속의 그녀가 바로 달력 속에 있는 실존 인물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으며 어쩌면 상상 속의 그녀가 실제로 이 달력 모델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환상으로 가려져 버렸던 그녀의 존재가 다시 현실감을 갖게 되는 지점이라 볼 수 있다. 사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구분 짓기 어렵고 두 개의 사건이 어느 순간 전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에서는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