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동산

건축디자인의 심리학(1)

공간, 행동, 그리고 인간의 경험

by 쏴재

하얀 도화지를 받으면 머릿속도 도화지처럼 백지 상태가 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표현하고 싶은 감정이나 아이디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아 방향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하거나 반대로 너무 적게 담으려 할 때 이런 혼란이 생기기 쉽습니다. 디자인은 이런 혼란 속에서 방향성과 제약이 주어질 때 빛을 발합니다.


디자인은 물리적 환경과 비물리적 환경이라는 두 가지 주요 요소의 영향을 받습니다. 물리적 환경은 도화지, 그림 도구, 혹은 건축의 경우 대지와 같은 눈에 보이는 것들이고, 비물리적 환경은 디자이너의 관점, 사회문화적 배경, 그리고 창작자가 지닌 철학과 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들입니다.


건축 공간을 설계할 때 주어진 물리적 환경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대지의 크기나 형태는 설계의 한계를 정합니다. 학교를 설계하는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대지가 넓고 용적률이 높은 경우, 큰 대학교 캠퍼스와 같은 공간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반면, 대지가 좁다면 작은 교육시설만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물리적 제약은 사람들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제약하지는 않지만, 공간과 행동은 상호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공간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는 많습니다. 1980년대 후반, 런던의 에드먼턴, 햄리츠 타워, 해머스미스 지역에서 가로 조명이 범죄율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사례가 있습니다. 가로 조명을 기존 평균 5럭스(lux)에서 10럭스로 높였을 때,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범죄와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이 감소했습니다. 보행자 수가 50% 이상 증가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결과는 단순히 조명의 변화 때문만은 아닐 수 있습니다. 연구 당시 CCTV가 함께 설치되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리적 환경의 변화가 우리의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공간이 사람들의 행동을 형성하는 방식은 여러 분야에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행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그 공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광화문 광장은 처음부터 집회를 위한 장소로 설계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주요 집회 장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소비 행동의 설계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거 백화점은 의도적으로 창문을 배치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소비자가 외부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여 쇼핑에만 몰두하도록 만들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카지노에 시계가 없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소비 공간은 더욱 다면적으로 진화했습니다. 소비자가 구매하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와 경험입니다. 애플스토어는 체험형 동선을 통해 자연스럽게 제품 탐색과 구매 결정을 유도합니다. 하우스 오브 신세계, 시몬스 침대 체험 공간, 더현대서울의 리테일 테라피, 29CM의 체험형 매장 등도 이러한 변화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건축 디자인에서 시간은 공간과 행동만큼이나 중요한 요소입니다. 건축물은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존재합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건축물은 이런 시간의 축을 잘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클레오파트라가 살았던 기원전에도 피라미드는 이미 고대의 유물이었습니다. 피라미드가 건설된 시점부터 클레오파트라 시대까지의 시간은 약 2,550년이고, 클레오파트라가 세상을 떠난 후 오늘날까지의 시간은 약 2,050년입니다. 우리가 클레오파트라를 "고대 인물"로 인식하는 시간보다 그 당시의 피라미드는 이미 더 오래된 것이였습니다.


건축 공간 디자인은 물리적 한계, 사람들의 행동, 그리고 시간이라는 세 가지 주요 요소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요소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이를 잘 이해할 때 비로소 성공적인 설계가 가능해집니다.


한국에서는 개인적으로 집을 짓는 경우가 드물지만, 인테리어를 통해 자신의 공간을 표현할 기회는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인테리어를 선택해야 할까요?


다음 편에서 이 질문에 대해 깊이 탐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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