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꿈을 꿨다.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 열차를 타고 어딘가를 가는 도중이었다. 여자 선생은 내게 학생 신문 기자를 하라며 매월 20만원의 장학금을 준다고 제안했다. 빡통을 이리저리 굴려보니 한 학기에 60이라 이 돈으로 어디여행 다녀올 돈은 되겠다 싶어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찰나에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Wiwek - Killa. 시끄러운 EDM노래는 내 행복한 단잠과 꿈을 살해했다. 불쾌함이 지펴졌다.
아침 8시가 넘어가자 여러 사람들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카톡들이 오기 시작했다. 기뻐야 하는데 그리 기쁘지 않았다. 텍스트 안의 마음을 보지 못한 것일까. 뭔가 따듯한 한마디라도 오길 바랬는데 단톡방에 덩그러니 정규일의 생일이라는 정보가 표류했다. A에게서 B에게로. B에게서 C에게로. 평소 나를 싫어하던 D는 무시. 내 정보의 표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심란했다.
그 표류 중에 베트남으로 여행 다녀오신 부모님이 돌아오셨다. 그 소리에 침대에서 일어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베트남에서 사 오신 노니열매 비누, 노니 가루, 노니 즙. 그리고 덤으로 딸려온 어머니의 노니 효능. 지금은 사라진 약장수가 말하듯 어머니의 입에서는 노니는 만병통치약로 탄생되고 있었다. 태어나서 2번째 다녀오신 외국에서 어머니는 많은 걸 느끼고 배워 오신 듯하다. 입은 지금 멈추면 다칠 것 같아 쉴 새 없이 떠다녔다.
지하에서 나와 지상에서 맞은 학교는 그대로였다. 뭔갈 기대했을까. 내 생일을 알고 반겨줄 사람을 원했을까. 반가운 한마디. 학창 시절, 주먹 한방에 생일을 축하하던 그 정겨움. 그 주먹이 그리웠다. 역시나 "연휴를 앞둔 금요일의 학교는 나의 생일을 축하해주기에는 너무나 한산했나" 그런 자위가 떠올랐다.
수업이 끝나고 생일의 무거움을 떨치기 위해 나를 위한 첫 번째 선물을 했다. 콜라와 녹차맛 빼빼로를 까서 어린이대공원으로 들어갔다. 녹차맛 빼빼로 특유의 쌉싸름하면서 달콤함으로 퍽이나 맘에 들었다. 콜라는 코카인이 들어갔을지는 몰라도 그냥 좋았다. 내 혀와 미각은
" 아 그냥 존니 좋아!ㅎㅎㅎㅎㅎㅎㅎㅎ"
이러고 있었을까? 그런데 저 아래 심연 속에는 "아시벌 인생 존나게 고독하구만"이란 대사를 누가 위로 외쳐대고 난 그 외침에 놀라 땅속으로 처박혔다. 혼자 걷다 이 사실에 치이고 나니 누군가에게 꼭 털어놓고 싶었다.
원래 세상일이 그렇듯 안 풀리면 또 더 안 풀릴 수도 있는 게 세상일인 것 같다. 연락한 친구는 내일 있을 지방직 공무원 시험을 위해 마침 고향에 내려가고 있는 길이었다. 더 이상 이을 말이 없었다. 그 미안함을 덮으려 메세지에 딸려온 짤방은 내게 잠시 미소를 짓게 했다.
내면의 우물을 살피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오르막이다. 맘과 몸이 지쳐 벤치에 앉아, 마저 콜라를 마시려던 찰나에 오르막 아래에서 아이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힘을 내자! 힘을 내자!
정강이밖에 안 오는 귀여운 꼬꼬마들이 2열로 선생님들 졸졸 따라 오르막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힘을 내자! 힘을 내자! 힘을 내자! 힘을 내자! 지치지 않는 힘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이들은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주문을 걸고 있었다. 아니, 선생님이 구령을 넣고 아이들이 따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의 발걸음은 나처럼 무거워 보이지 않았고 경쾌했고 씩씩했다. 군인의 발걸음이 절도 있는 것이라면, 아이들의 발걸음에는 특유의 밝음이 있었다. 꼬마들의 목소리는 나의 마음을 날개짓했다. 무풍지대였던 내 마음에 아이들의 발걸음에 걸린 순풍이 불어왔다.
공원에 들어오며 "전 여자친구가 내 24번째 생일에 선물한 청남방을 입고 나오는 게 아니었다"라는 무게감을 잠시 접어뒀었건만. 여태 제일 사랑했고 사랑해줬던 사람이 챙겨준 생일의 기억이 나를 지배하기를 시도했었다. 그 지배 아래에는 '비교의 참담함'. '내가 준만큼 받고자 하는 욕심', 그리고 '사람에 대한 실망'이 존재했다.
귀신이 떠나갔다면 이런 기분일까. '힘을 내자!'라고 외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그 모든 것이 떠나갔다. 사람들은 내게 생일을 축하하려는 마음이었지 저주하려는 맘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축하한다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겠지. 결국 내 마음을 무겁게 한 장본인은 나였다. 나의 과거였고 나의 욕심이었다. 무언가 받고 싶었을 것이다. 이해한다. 그런 마음. 그런데 내가 한만큼 사람들은 신경 써주고 챙겨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라고 마지막 말을 내게 남긴 그녀에게, 나는 발끝부터 사람에게 맘을 놓고 싶고, 기대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으로 보였을 거다.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 더 꾸밀 말이 없다. 사람에게 안 기댄다고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력과 마음씀은 그 반대급부, 그 되돌아옴, 그 원금 회수, 그 이자를 노리며 베풀었다는 것을 또 또 나는 확인했다.
결국 예금 잔고는 내 욕심 가려 보이지 않았고 욕심에 빠져 텅 비게 되었다.
맡기고 간 달란트도 있는 것도, 다 잃었던 종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선물을 주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을 즐길 시간 2시간과 책 한 권을 선물했다. 하나면 될 거라 생각했지만 나는 나를 사랑하기에 더 좋고 더 많은 것을 선물했다. 하나는 생일이라는 시간을 좀 더 기쁘게 보낼 시간을. 또 하나는 나의 미래를 위해 따듯한 책 한 권을.
남은 잔고를 보며 행복해하길. 그게 돈이든, 시간이든, 마음이든, 사람이든, 표류하는 정보든, 잊힌 선물이든. 그리고 내 마음밭이든.
그저 남에게 내 불쾌함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넘겨주지 않기로 했다. 짤방처럼 잠시의 기쁨은 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내 달란트는 내가 지켜야하고 내가 가꿔야 한다. 내가 해결하고 남이 축하해하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축하하고 선물하고 기쁘게 하기로 생각했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오늘이 최고의 생일이었다고 여길 수 있길 바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