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고양이 세 마리가 있다. 올해 10살인 ‘코코’와 8살 ‘자몽’ 그리고 몇 해를 살다가 나를 만났는지 알 수 없는 ‘페리’다. 페리는 새하얀 털을 가진 터키시앙고라 종으로, 지금은 유골함 속에 잠들어 있다. 거실 창가에 있는 장식장은 페리만을 위한 공간이다. 총 세 칸으로 이루어진 그 안에는 오직 유골함과 페리를 닮은 고양이 인형만 넣어두었다. 가끔 페리가 좋아했던 간식을 올려놓기도 한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페리는 우리 집에서 해가 가장 잘 드는 자리에 있다.
3년 전 이맘때 페리를 처음 만났다. 이따금 봉사를 다니며 인연을 맺은 한 유기동물보호단체의 SNS에서였다. 영상 속 페리는 새하얀 털이 듬성듬성 잘린 채 엉덩이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만큼 말라있었다. 보호소 마당 구석에 누군가 고양이가 든 철장을 두고 떠났다고 했다. CCTV가 두려웠는지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버리고 간 탓에, 페리는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발견됐다. 온몸이 곰팡이 피부병으로 뒤덮인 페리는 구조 후 식음을 전폐해 항우울제와 식욕촉진제를 맞았다. 그럼에도 사료는 한 톨도 입에 대지 않는 상태였다.
단체에서는 페리가 기운을 회복하기까지 임시보호 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마음의 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새로운 가족을 찾아주는 것이지만, 이 몸 상태로는 누구에게도 선뜻 입양을 권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맛있는 통조림을 줘도 움직이지 않던 페리는 사람만 보면 아슬아슬 걸어가 손에 얼굴을 비볐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봉사자가 병원 철장 문을 닫자 마른 나뭇가지 같은 다리를 철장 사이로 내밀며 갸릉갸릉 우는 영상이 며칠째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매일 SNS를 들락거리며 새로운 소식을 기다리던 우리 부부는 결국 페리의 임시보호를 신청했다.
당시 나는 18년간 함께한 반려견 뭉치를 떠나보낸 뒤, 살면서 가장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산책하는 강아지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눈물이 쏟아져서 대낮에도 암막 커튼을 치고 어두컴컴한 집에 칩거할 때였다. 눈 뜨면 술을 마시고, 울고, 자고, 또 술을 마시면 하루가 갔다. 그 엉망진창인 순간에 페리가 왔다. 페리를 처음 안았던 날이 지금도 선연하다. 뭉치가 죽고 가장 견디기 괴로웠던 건 촉감의 상실이었다. 온종일 손끝에 뭉치의 몽실몽실한 감각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뭉치를 만지고 싶어서 코코와 자몽이를 한껏 끌어안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런데 길고 나풀나풀한 털을 가진 페리를 안으니, 비슷한 털을 가졌던 뭉치를 다시 안은 듯 했다. 임시보호는 어쩌면 페리가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한 일이었다.
그 애에게 밥을 주고, 피부병 약을 바르고, 목욕을 씻기느라 나는 술을 끊고 일상으로 돌아갔다. 페리도 놀라울 만큼 빠르게 기력을 회복했다. 사료에 섞은 닭고기 조각을 쏙쏙 빼먹고, 간식 주머니를 마구 뒤졌다. 페리를 구조한 봉사자도, 3주 가량 페리를 돌본 동물병원 의료진도 깜짝 놀란 변화였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병원 밥은 입에 안 맞나 봐요.” 뱃가죽이 등뼈에 들러붙은 듯한 페리를 앞에 두고 함께 울었던 우리는 이제서야 겨우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한 달쯤 지나자 페리의 엉덩이에도 차츰 살이 올라, 앙상한 고양이에서 조금 마른 고양이가 되었다. 기력을 회복했으니 얼른 새 주인을 찾아줄 차례였다. 나는 임시보호자일 뿐, 우리는 이별이 기약된 사이라는 걸 잊지 않으려 노력했다. 페리의 물건은 모두 코코와 자몽이 쓰다 만 것뿐이었고, 내 고양이라면 당연히 해줬을 건강검진을 건너뛴 게 그 마음을 증명한다. 오로지 입양에 걸림돌이 될만한 피부병 치료에만 정성을 쏟았다. 새하얀 털에 호수처럼 푸른 눈을 가진 품종묘인 페리는 누가 봐도 매혹될 만큼 예뻤다. 페리의 얼굴에 반해 입양상담을 받는 사람이 많았지만, 몸을 뒤덮은 피부병을 보면 모두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피부병은 낫질 않았다. 우리 부부는 고민 끝에 페리를 입양하기로 했다. 버림받은 상처로 굶어 죽으려 했던 아이를 몸이 아픈 채로 다른 집에 보내는 게 영 불안했다.
진짜 가족이 되자 페리의 귀여운 진가가 더 잘 보였다. 페리는 원하는 게 있으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갸릉갸릉 울었다. 털이 복실한 발바닥으로 소리 없이 폭폭폭폭 걸어와 늘 50cm쯤의 여유를 남기고 대각선에 붙어 앉았고, 심심하면 자몽이 발을 깨물고 도망가다가 꼭 제 발에 걸려 넘어졌다. 자꾸 달리기를 해서인지 페리를 안으면 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리고 페리의 이 고유한 특성은 모두 심장병 증상이었다는 걸, 그 아이가 죽은 뒤에야 알게 되었다.
정식으로 가족이 된 지 6개월 만에, 심장병을 발견한 지는 18시간 만에 페리는 숨을 거두었다. 분명 아침까지 잘 노는 걸 보았는데, 임신 초기 입덧으로 힘들어하던 내가 깜빡 잠이든 사이 일이 난 것이다. 왱왱 우는 소리를 듣고 거실에 나갔더니 페리의 다리가 움직이질 않았다. 곧장 병원에 데려갔지만 손 쓸 수 없는 수준의 심장병 말기라고 했다. 혈전으로 막힌 다리의 혈관을 뚫기 위해 페리는 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페리가 온갖 처치를 받는 동안, 나는 병원 벤치에 앉아 뱃속의 아이를 데려가도 괜찮으니 페리만 살려달라고 빌며 울었다. 이후 의사들이 심폐소생술을 하고, 검은 상자에 담긴 페리가 나오고, 화장을 했던 일들이 조각조각 기억난다. 나는 다시 암막 커튼을 치고, 풀풀 날리는 페리 털을 줍기 위해 청소기조차 돌리지 않는 엉망진창의 삶으로 돌아가 얼마간 살았다.
임시보호라고 마음의 선을 긋지 않았다면 좀 더 세심하게 건강을 살폈을까? 내가 임신을 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빨리 병원에 데려갈 수 있었을까? 혈전을 뚫을 수 있는 골든타임인 6시간이 지나기 전에 대학병원으로 옮겼다면 지금 페리는 살아있을까? 자책에는 힘이 없다는 걸 알지만 페리의 죽음 앞에서는 빠짐없이 나에게 죄를 묻게 된다. ‘버릴 거면 심장병에 걸렸다는 쪽지라도 남겨주고 가지’ 어디서부터 바로잡을 수 있을지, 매번 페리를 처음 발견한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지만 무엇을 탓해도 페리를 살릴 수가 없다.
페리가 떠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이사를 했다. 거실이든 부엌이든, 집안 어느 공간 하나 제대로 없이 변변치 않은 구색만 갖춰져 있던 작은 빌라에서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 왔다. 나를 따라 네 평짜리 자취방과 열댓 평짜리 신혼집을 전전하던 코코와 자몽이는 그동안의 설움이 많았는지 매일 거실 복도를 내달린다. 더 신나게 뛰라고 층간소음 매트를 깔면서 페리를 생각했다. 같이 왔으면 제일 좋아했을 텐데, 조금만 더 살지. 페리가 선물로 남긴 듯한 뱃속의 아기는 건강히 태어나 벌써 어린이집에 간다. 남편은 큰 회사로 이직했다. 좁은 방에 복작복작 모여 함께 그렸던 미래는 다 있는데, 페리만 없다.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날이 많다. 페리가 떠난 뒤로 줄곧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