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에 대한 내 첫 기억은 어두운 골목길에서였다.
나는 경리단길에서 나고 자랐다. 요즘에는 경리단길로 불리며 많은 젊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장소이지만 그 당시는 이태원2동이라 불리는 작은 동네에 지나지 않았다.. 이태원 소방서와 해밀턴 호텔이 있는 우리가 아는 그 이태원은 이태원1동이었지만 굳이 1동을 붙이진 않았다. 하지만 이태원2동은 꼭 2동이라고 붙여야만 했다. 지금은 서울디지텍고등학교로 불리는 청지 공고 후문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면 파란색, 빨간색 기와를 올린 허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그런 동네였다. 그 집들 사이에 우리 집이 있었고 내가 있었다.
동네 친구들과 골목에서 한참을 놀다 가로등이 켜지면 모두 흩어져 집으로 갔다. 가끔은 하던 놀이가 끝나지 않아 해가 한참 진 후에 집으로 가는 날이면 골목길 가로등에 의지하며 좁은 길을 지나가야 했다. 어두운 골목을 따라 혼자 가는 길은 언제나 익숙지 않았다. 가끔은 등골이 오싹해질 때가 있었고, 그럴 때는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데 꼭 돌아보고야 만다. 희한하게도 내 등골의 오싹함은 대부분 나를 노려보는 그 눈 때문이었다.
노란색과 주황색이 섞인 무늬를 가진 채 날 노려보는 눈. 전설의 고향에 나오던 구미호의 눈. 가로등 밑엔 한껏 웅크린 고양이가 있었다.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난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나에게 뛰어와 날 할퀼 것 같았다. 꽤 먼 거리라 내가 도망치면 고양이가 들이닥치기 전에 집으로 피신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을 마주친 채로 우리는 꽤 긴 시간을 대치했다. 대치당했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고양이의 눈을 보고 있자니 숨 쉬는 것마저 힘들었다.
고양이도 꼼짝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세도 고치지 않은 채 나를 노려봤다. 그렇게 고양이와 한참을 대치한 채로 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원했다. 도움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해가 떨어지고 밥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나를 찾는 할머니의 외침 또는 마침 그 골목길을 지나가려는 행인이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고양이와 무언의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고양이 앞에서 움직일 수 없던 이유는 낮에 했던 내 행동의 죄의식이었던 것 같다. 동네 언덕에 올라 다닥다닥 붙어있는 지붕을 보고 있으면 꼭 고양이 한두 마리는 있었다. 고양이는 나를 발견하면 먼발치로 도망가 노려봤다. 나는 작은 돌멩이를 주워 던지며 고양이를 위협했다. 그럼 더 멀리 뛰어가 다시 나를 노려봤다. 그 모습에서 의기양양하며 고양이를 놀리고 소리치던 기억이 있다.
돌 던지고 소리쳤던 행동의 보복. 가로등 밑에서 살금살금 다가와 내 등을 할퀴진 않을까, 내가 했던 일을 다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 죄책감이 고양이를 무섭게 만들었고, 꽤 오랜 시간 내 기억에 자리 잡았다. 어른이 된 후에도 골목길에서 고양이를 마주치면 멈칫하는 습관이 생겼다. 무서운 건 아니었지만 고양이를 보면 항상 골목길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난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고양이는 기른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