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풍하다

by 햇쌀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함박눈이 비 쏟아지듯 내리더니, 갑자기 날씨가 목화솜처럼 포근해졌다.

로코의 겨울 패딩을 벗기고 산책 나갔다. 보드라운 배냇 털이 겨우내 탐스럽게 자랐다. 사자의 갈퀴 같은 위풍도 멋지지만, 바람에 날리는 동물의 갈퀴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로코의 갈퀴가 바람에 날린다.


조금씩 길어진 해가 노루 꼬리를 넘어섰다. 확실히 태양을 볼 수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4시가 넘었는데도 인릉산 위로 해가 높이 떠 있다.

등받이 벤치에 앉아서 즐기는 태양의 은혜. 따스한 햇살이 목덜미의 긴장을 조금씩 풀어낸다. 온화한 바람이 옷깃 속속히 파고든다. 바람결에 오늘의 굴곡을 씻어낸다.


산책 나온 강아지들이 겨울옷을 벗고 마음껏 제 털을 공중에 털어댄다. 엄마품에서 풍기는 마른 풀 냄새를 흠흠 만끽하는 듯하다.. 조만간 식물의 잎사귀 잔털에도 윤기가 흐르리라.


흠, 풍경의 으뜸은 자연과 어울린 아이들이 아닐까. 아이들이 뛰어노는 푸른 하늘 아래 연갈색 잔디밭.


바람과 사람이 면바지에 체크무늬 남방처럼 잘 어울리는 날이 있다. 독수리 그림이 그려져 있는 연을 들고 나온 부자는 신이 났다.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하늘빛에 섞인다. 씽씽 부는 찬바람에 띄우는 겨울 연도 운치 있지만, 봄바람에 살랑대는 연은 물결처럼 넘실대며 눈동자 속을 파고든다. 연은 바다에서 금방 나온 생선 비늘처럼 주변에 생기를 주고, 바람은 아이들의 생기 있는 목소리를 집어 멀리 나른다.


화사한 봄꽃 몽글기 전 풍경이다.

공원에 활기가 넘치는 것은 아이든 어른이든 사람이 남녀노소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검은색 백팩을 등에 멘 남자와 핸드백을 어깨에 얌전히 늘어뜨린 여자가 지나간다. 쌍쌍이 데이트하는 꿈 많은 청춘,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사람, 원반을 주고받은 할아버지와 손주. 또각또각 목발을 짚고 걷는 깁스 한 발자국 소리에도 어떤 기운이 어렸다. 커다란 비눗방울이 두둥실 하늘을 담아 무지개 빛으로 부풀자, 긴 막대로 방울을 터트리는 아이의 웃음에서 툭 터지는 희열을 느낀다.


작년 가을에 입양한 반려견 로코와 겨울 외투를 벗고 봄바람을 만끽했다. 로코는 올 겨울 동안 모든 예방 접종을 마치고 중성화 수술 절차까지 했다. 힘든 시기를 잘 넘어주었다. 견 나이 아직 한 살이 안되었는데도 새해가 되자, 앉아 있는 뒷모습이 어엿해 보인다.


오늘처럼 산들바람 부는 날이 일 년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 좋은 날은 잘 잊어버리고 힘든 날은 기억에 새겨 넣어서 인지,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면 봄날 같은 날이 자주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나가던 큰 개가 로코 가까이 다가와서 인사한다. 호흡을 교환한 종이 다른 두 개가 서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입을 살짝 마주치곤 서로의 냄새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기쁘다는 표현, 두 꼬랑지가 떨어질 듯 한들거렸다.


개의 언어를 공부해야겠다. 로코가 아프다고 표현해도 못 알아들을까 봐 염려되서다. 현 코로나 바이러스가 동물에겐 감염되지 않는다니 불행 중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도 혹시나 해서 얼마 전에 개 코로나 예방 주사라는 신기한 주사를 맞혔다. 백신을 맞을 내 차례는 언제가 될까.


독수리 연이 떠 있는 드높은 하늘 위로 비행기가 지나간다. 사라지고 다시 새겨지는 흰 깃털 같은 비행운을 끌고 가는 비행기. 눈길이 바람결 같은 시간의 흔적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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