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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by 리시안


한참 빈 모니터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어요. 눈에 들어온 한쌍의 말 인형이 있어요. 나이가 스물하고 네 살은 더 됐나 봐요. 저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 한쌍이었으니 어쩌면 제 나이와 비슷할지도 모르겠어요.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사온 석고 인형이거든요. 그동안 이사를 몇 번 했는데도 용케 챙겨 왔더라고요. 가져왔었는지도 몰랐어요. 무심했어요.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서 제일 오래된 장식품이었네요. 생각난 김에 비누거품내서 좀 닦아줘야겠어요. 봐주지도 않았더니 서운함처럼 잔 먼지가 쌓였네요. 침대 옆 스탠드 아래 있는데 왜 오늘에야 제 눈에 들어온 것일까요. 참,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정작 옆에 있는 것은 잘 보지 못하는것 같아요. 빈자리만 보이면 채우려고 했지 있는 것은 시선 밖의 일이 되어 버려요. 그렇다고 마음속으로 '그래야지' 작정을 하고 그러는 건 아니에요.


그런 날이 있어요. 어떤 날이냐면 혼자 독백처럼 쓰는 것보다 누군가와 말하고 싶은 날이요. 그날이 오늘이에요. 네모난 모니터에 커서가 한참을 깜박거렸어요. 원래는 혼자서도 잘 놀아서 이런 감정이 드는 건 오랜만이에요. 결혼 전에도, 연애하기 전에도 혼자 영화 보러 다니는 것도 좋아했고, 서점 바닥에 앉아 책 읽는 것도 좋아했어요. 그러고 보니 저는 서점 바닥에 철퍼덕 잘 앉는 아이였나 봐요. 그런 저를 엄마가 보셨으면 한소리 하셨을 거예요. 고등학생 땐가 친구들이 순대를 사 와서 함께 먹은 적이 있었는 데 제가 간을 잘 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했어요. 뭐 놀랄 일은 아닌데 제가 못 먹을 줄 알았다네요. 저는 친구들도 다 먹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끔은 서로의 선입견이 깨지는 날이 왠지 반갑기도 하죠.


그렇게 혼자 보다 둘이 즐겁고 여럿이 즐겁게 보내는 시간에 익숙해졌어요. 요즘은 혼자 있을 틈이 별로 없어요. 글을 쓰는 새벽과 한밤중이 아닌 이상 늘 바쁜 편이에요. 그래서 심심한걸 잘 몰라요. 그런데 쓸쓸한 걸 알게 됐어요. 심심해야 쓸쓸한 게 아니더라고요. 그 마음은 마치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머리카락을 날릴 때 느낌이에요. 보이지 않던 거리의 꽃들과 나무들이 보여요. 지인들 말이 자연이 좋아지면 나이가 드는 것이라던데 제가 그래요. 세상에 자연이 그렇게 이쁘고 기특할 수가 없어요. 늘 착한 순행을 하고 있었어요. 나이가 들어서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네요. 떨어지는 낙엽도, 단풍도 이뻐할 예정이에요.


살면서 유독 마음이 갈 때가 있어요. 물건도 그렇지만 사람도 그래요. 걱정되고 마음이 쓰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또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항상 서로를 바라보진 못하더라고요. 각자가 눈길이 더 가는 방향이 있어요. 그곳엔 더 좋아하는 마음이 있을 테지요. 누구나가 같은 마음일 순 없어요. 다르니깐요. 살아오면서 굳어져버린 습관과 말투와 행동의 방식이 맞지 않을 수 있어요. 오늘은 뜬금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서로가 좋아하는 마음을 만나면 행복해지는가 봐요. 쉬운 일이 아니라는걸 알아서요.


떠난 마음은 잘 접어두어야 해요. 버릴 것 까진 없어요. 버린다고 또 버려지는 것이 마음이 아니에요. 오늘 어쩌다 한 마음을 접었어요. '여기까지'라고 접어서 마음 깊이 두고 잊어버려요. 몸이 바쁘고 할 일이 많아져도 그렇게 되고요. 대단한 것이 사람이지만 사람이 마음을 많이 담고 살아가긴 벅차요. 담겨질 만큼만 남을꺼에요.

아, 망각도 있네요. 그건 그냥 세월과 만나면 생길 수 있어요. 저도 그래요. 이럴 때 인연 이야기 잠깐만 할게요. 힘든 인연은 좋은 인연이 아니라고 했어요. 그리고 남겨질 인연은 어떡하든 남는 것이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혹시라도 떠난 인연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고요.


처서도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주니 괜스레 안 하던 것도 해보게 되네요. 가을을 타려는 건 아니에요. 가을 또한 예뻐라 해줄 거라서 반가워요. 그냥 오늘은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싶은 날이었어요. 그런데 이런저런 내 마음을 마주하고 하려니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날이라서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님들께 편지를 쓰기로 했네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편지가 날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기쁜 일이란 걸, 지금 또 느껴요.

자신을 바라봐 주는 방향으로 바라보시길요. 그렇게 마주 보기에도 시간은 짧으니깐요.


어느 술렁거린 날 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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