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시안 May 25. 2023

투박한 화해의 기술


지난 일요일에는 남편과 싸웠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싸운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화냄을 받았어요. 얼굴을 마주하고도 아니고 휴대폰 너머로 들리던 남편의 얄짤이 없던 목소리에 여태껏 내가 알던 사람이었나 싶었지요. 사건은 일요일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요. 운전으로는 한 시간, 대중교통으로 두어 시간 정도에 있는 회사 연수원으로 남편의 교육이 있었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해 짐을 싸줬어요.


5일 교육은 처음이었거든요. 아주 오래전 외국 출장 때 보름을 떨어진 거 말고는 결혼해서 제일 긴 교육이었기에 정말 성심껏 짐을 싸주었네요. 처음 혼자 여행 가는 아들 챙기듯이요. 그게 문제였어요. 과한 것이요. 정작 구김 가지 말라고 현관에 걸어두었던 재킷을 챙기지 못했어요. 제가 다 넣었으니 가져가면 된다고 했거든요. 그렇게 남편은 트렁크에 넣은 줄 알고 출발했어요. 어떻게 하면 각 잡아 다린 와이셔츠 5개를 잘 넣을까만 생각하다가 그만 중요한 걸 까맣게 잊어버린 거에요.


휴게소에 들 때쯤일까 제가 커피를 마시다 번쩍 떠오른 거예요. 뿌리지 않는 향수까지 뿌려서 걸어 두었던 남편의 재킷이요. 식은땀이 났어요. 아들에게 남편의 재킷이 덩그러니 걸려있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 정말이지 눈앞이 하얘지고 심장이 쿵쿵거렸어요. 왜 이렇게 재킷에 신경을 쓰느냐고요, 재킷이 권고사항이라는 문구가 있었지만 어려운 저녁 식사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꼭 챙겨줘야 한다는 것에 그야말로 꽂힌 거지요.


남편에게 재킷이 빠진 것을 알려주니 예상대로 괜찮다는 거예요. 괜찮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요. 갖다줄까 했더니 정말 괜찮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꽂혔다 했지요. 들고 갖다줘야 할 것 같았어요. 결론이요, 갖다주려고 가다가 돌아왔어요. 남편이 괜찮다면 하지 않는 게 맞는다는 거였어요.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얄짤이 없던 남편의 목소리는 오래갈 것 같아요. 그런데도 화는 낼 수 없었어요. 마치 아들 녀석 학교 갈 땐 싫은 소리 못 하는 것과 비슷해요. 무사히 교육을 마치고 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사이 제 마음은 돌볼 겨를이 없었어요. 그런데 마음은 속상했어요. 챙기지 못했던 것과 비껴간 마음 모두요. 남편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지 않고 저녁에 무리하게 움직였던 것에 마음이 상했고 저는 차갑던 남편의 말투에 마음이 상해 버린 거지요.


5일 내내 남편은 매 식사때마다 음식사진을 보내왔어요. 어느 날 새벽엔 화상통화로 교육원 풍경을 보여줬어요. 재킷 이야기는 하지 말기로 했어요. 그래서 아직 저녁 식사 시간에 무슨 옷을 입었는지 몰라요. 저도 묻지 않았어요. 사실 묻지 않는 건 제 마음이 온전히 풀리지 않아서예요. 그런데 풀리지 않아도 화해는 하는 것 같아요. 남편은 매일 세끼의 사진을 보내는 것으로 화해를 청한 것이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풀려가는 중이거든요.


친한 동생들과 남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남편의 입장으로 이야기했어요. 필요하면 남편이 돌아와서 가져가는 게 맞는다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남편이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게 맞는다는 거예요. 어쩌면 동생들이 바라보는 모습이 정확할지 모르겠어요. 제 마음이 편해지자고 갖다주려고 한 것도 있었으니까요.


남편과 저는 크게 싸워본 적이 없어서 세련된 화해의 기술도 없어요. 누군가는 서로가 하고 싶은 말을 참아서라고 해요. 그러다 덜컥 갱년기가 오면서 남편은 남편대로 저는 저대로 성격에 변화가 온 거예요. 그런데도 결국은 말을 삼켜요. 누군가 저와 남편이 그날의 이야기는 해봤냐고 묻더라고요. 할 말은 하고 일상이 다 똑같아요. 다만 그날의 일만 꺼내지 않아요. 남편은 열 배는 아니고 두 배쯤 친절해요. 하나를 말하면 둘을 대답하네요. 그냥 그런 것들이에요. 제게 건네는 남편의 화해는요.


저는 남편이 좋아하는 식혜 만들기를 멈췄어요. 교육 기간 동안 안 하고 며칠이 지났으니 열흘쯤 안 만들었나 봐요. 소심한 복수 같은 거였죠. 만들까 하다가도 몸이 따라주지 못했어요. 사다 놓은 엿기름을 며칠째 쳐다만 봤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오늘은 엿기름을 물에 불려 놓아야겠어요. 저도 밥알 가득한 아침 식혜가 너무 맛있거든요. 출근할 때 남편이 맛있게 마시고 간 빈 그릇을 보면 뿌듯한 것도 어쩌겠어요. 그렇다고 마음이 다 풀린 건 아니에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요. 산다는 것이요. 다 표현하고 살 수는 없어요. 노래 제목처럼 전하지 못하는 진심이 있을 테고 때로는 전하지 않는 마음이 나을 때도 있을 테니깐요. 저절로 가는 마음, 그게 문제에요. 잘 붙잡고 가야겠어요. 우리의 마음이요.



  


매거진의 이전글 식혜와 마카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