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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준원 Feb 21. 2024

지금까지 글이 아닌 글씨를 쓰고 있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글을 쓰는 것과 글씨를 쓰는 것의 차이를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용을 읽다가 문득 내가 지금까지 쓴 글은 글씨를 쓴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내 문장이 화려해 보이고, 잘 쓴 글이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 내가 느끼기에 감동이고, 멋진 문장은 표현을 다르게 써보려고 애썼다. 그 안에 내 생각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6년여의 독서 생활로 책을 읽고 공감하는 문장에 밑줄을 긋고 정리하는 습관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 정리한 내용은 그 누군가에게 잘 요약되고 수려한 문장으로 읽힐지도 모르지만, 어찌 보면 나에게는 글씨를 쓰는 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긴 글의 서론은 대부분 지난 추억이나 사건을 토대로 문장을 써 내려가지만 본문의 대부분은 책의 내용을 용약하는 '글씨를 쓰는 일'에 불과하다.


타인의 생각이 나에게 스며들어 혼합되는 과정에서 다른 색이 나타나야 진정한 글을 쓰는 행위일 터인데, 작가의 글을 그대로 흡수해서 동일한 색을 띤 글이 무척 많다. 왜 글쓰기에 생각이 많고, 욕심은 끝이 없을까. 사전투표를 끝내고 산책로를 걸으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쓴 글을 누군가가 소비하며 '잘 썼다'라는 인정을 받고 싶어서였을까.



나의 글을 쓴다는 것.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 글을 잘 써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도 있었지만, 얼마 전에 <책쓰기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를 읽고 예전에 출간 제의를 받았던 내용이 떠올라서였다. 게임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으로 16년을 일했고, 컴퓨터 학사, 석사를 취득한 이력으로 보면 20년을 넘게 컴퓨터 공학과 게임이라는 분야에 매진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한 가지를 꾸준히 지속했던 경력으로 게임 개발 관련 책을 집필하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사실 오랜 세월 게임 업계에 몸담고 있고, 게임을 좋아하지만 비전공자가 이해할 만큼 조리 있게 말하지도 못할뿐더러, 한 편의 긴 글을 쓰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아마도 무언가를 하기 전에 완벽한 모습을 꿈꾸는 완벽주의자 성향이 강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회사 업무도 바쁘고, 블로글에 글을 써야 하고, 글을 쓰려면 책도 읽어야 하고, 유튜브에 영상도 꾸준히 올리고 싶었다. 시간은 한정적인데도 불구하고 욕심이 과한 건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이런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내가 쓴 글이 책으로 세상에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내면에 꿈틀거리고 있다.




책을 어떻게 쓰면 될지 고민이 있을 즈음 읽은 <책쓰기가 이렇게 쉬울 줄이야>의 내용은 어렵지 않게 다가왔다. 먼저 어떤 대상에게 어떤 내용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항목은 고민하며 작성한 내용이 어느 정도는 마련되어 있다.


책의 구상도 이미 끝난 상태다. 게임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고, 그 게임을 만드는 개발자에는 어떤 직군으로 나눌 수 있는지, 그리고 각 직군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며 실제 게임 개발은 어떤 프로세스로 진행되는지 그 과정을 설명 글을 쓸 계획이다.


여기에 더해 중간중간 하나의 프로젝트를 실제로 구성하여 책의 마무리에서 자신이 만든 게임을 App Store에 업로드하는 흐름을 기획했다.


나름 목차도 나쁘지 않고 내용의 흐름도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밀려오는 압박감은 다름 아닌 원고 집필이었다. '어떤 내용으로 채워야 하지?', '너무 어려운 내용은 빼야 하는데', '코딩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면 어떻게 써야 하지?', '프로그래머 직군이 기획론을 써도 괜찮을까?' 온갖 잡념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내가 하려면 힘든 그것.

© f12r, 출처 Unsplash


막상 도전하려고 생각하면 완벽한 이상을 먼저 생각하며 능력을 의심하고, 커다란 목표에 좌절하는 모습이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는 타인의 죽음을 연구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사례가 나온다. 퀴블러 로스는 임종을 맞이하는 말기 환자들을 오랜 기간 연구하며, 죽음에 이르는 정신 상태를 5단계로 구분했다. '부정 - 분노 - 거래 - 좌절 - 수용'의 5단계로 말이다.


그런데 죽음의 정신 상태를 연구한 학자도 본인의 죽음 앞에서는 현자답게 행동하지 못했다. 흡사 타인에게 글을 쓰면 자신의 삶이 풍족해진다고 설파하는 나의 모습이 떠오르는 내용이었다.


글을 쓰기 힘들면 자신이 겪은 일을 의식의 흐름대로 써보면 비교적 글을 쓰기 쉽고, 결과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타인에게 말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실천하지 못했다.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는 바를 누군가에게 조언이랍시고 꺼냈던 지난 과거가 떠올라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고 실천으로 옮기고자 펜을 들었다.


'한 번에 백 점짜리 아빠가 될 수 없다. 계획을 잘 개 쪼개서 어제보다 한 걸은 전진하면 아이와 애착 형성은 가능하다고 본다.' 아이와 멀어진 관계를 회복하려고 심리 상담을 받으며 다짐한 내용이다.




그렇다. 너무 거대한 목표는 완벽주의자에게 시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압박감을 준다.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목표한 바를 달성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끝내 완성된 한 권의 책이 탄생할 것이다. 물론 '초고는 걸레다'라는 헤밍웨이의 말처럼 수차례 퇴고를 거쳐 탄생하겠지만, 일단 무언가 써야 퇴고라도 할 것 아닌가.


타인에게 지나온 삶을 조언해 주는 건 나름 쉬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 조언을 지속하며 실천하는 건 조언을 하는 사람이든 듣는 사람이든 모두에게 똑같이 어려운 일이다. 남이 써온 글의 표현을 빌려 쓰는 글도 필요하지만, 내가 느끼고 생각하며 토해내는 나만의 글을 쓰는 연습이야말로 온전히 글을 쓰는 행위가 아닐까. 이러한 연습은 끝이 없고 그저 흘러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참고 도서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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