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사람을 처음 봤다
게임 개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동료가 한 명 있었습니다. 나이도 두 살 정도 어렸고, 개발도 같이 하고, 운동도 같이 하고, 커피 마시면서 수다도 자주 떨었죠. 그렇게 시간을 많이 보내다 보니까 서로 어떤 성향인지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형 같은 스타일은 처음 봤어요.”
처음에는 칭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설명을 덧붙이더라고요. 겉으로 보기에는 되게 모범생 같고 일도 철두철미하게 하고, 그런데 생각하는 건 이상하게 진보적이고, 규칙을 지키라고 하면서도, 그 규칙이 합당하지 않으면 안 따른다는 식이고..
그 친구 말로는 “이 두 개가 같이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보통은 하나를 선택하거든요. 철저한 모범생 → 규칙, 질서, 위계, 체계. 진보적 사고 → 변화를 중시, 구조를 의심, 왜 해야 하는지부터 묻기.
그런데 저는 '규칙은 지키자'와 '근데 왜 그 규칙이야?'를 동시에 들고 있었던 거죠. 그 친구 눈에는 그게 상당히 흥미롭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아, 내가 좀 독특하긴 하구나.'
'남들이 보기에는 이중적인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구나.'
그래서인지 그 친구는 제 이야기를 잘 들어줬고, 저는 제 상황을 숨기지 않고 털어놓을 수 있었어요. 일 얘기, 집 얘기, 내가 왜 이렇게까지 당위적으로 굴게 됐는지까지요.
한 권의 책이 들어왔다
그 친구가 어느 날 책을 한 권 줬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저는 원래 책을 꾸준히 읽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필요하면 기술 문서나 논문은 보는데, 철학 서적을 읽는 타입은 아니었죠. 아. 중학교 시절에 영웅문이라는 무협지에 푹 빠져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달랐습니다. 내가 ‘소울 메이트’라고 불러도 될 만큼 마음을 열었던 친구가 “형, 이거 읽고 우리 얘기해요.”라고 말하면서 준 책이니까요. 그걸 무시하고 “나 책 안 읽어”라고 하기가 쉽지 않았죠. 읽기 시작했더니 바로 알겠더라고요.
“아.. 이거 나한테 필요한 책이구나.”
이 책은 '정의는 이런 거다' 하고 하나만 가르쳐주는 책이 아니잖아요. 같은 상황이라도 이렇게 볼 수 있고, 또 저렇게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전자를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후자를 정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이걸 계속 보여줍니다. 그때부터 제 머릿속에 아주 작은 틈이 하나 생겼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다양성의 수용을 맛보게 됩니다.
‘나만 정답은 아니네’를 느끼다
책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예가 있죠. 바로 트롤리 전차 딜레마 문제입니다.
전차가 열차 선로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그대로 달리면 5명의 인부가 사망한다.
레버가 하나 있는데, 레버를 당기면 다른 선로로 움직인다.
선로를 돌리면 1명이 사망한다.
당신은 레버를 당길 것인가?
대부분 이렇게 답합니다.
“1명이 희생되는 게 낫지.”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수학적으로도, 효용적으로도, '다수를 위해'라는 말로도 설명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게 맞는 거지” 하고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제가 나오잖아요.
전차가 열차 선로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그대로 달리면 5명의 인부가 사망한다.
다리 위에 덩치 큰 사람이 서 있다.
그를 떠밀면 전차는 멈추고 5명의 인부는 살아난다.
그러나 그 사람은 사망한다.
당신은 밀겠는가?
여기서 대부분 멈춥니다. 저도 멈췄고요. 그렇지만 저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생각에 '밀겠다'라고 답했습니다. 신기한 건, 이걸 그 친구와 이야기할 때였습니다. 저는 선택을 했고, 그 친구는 그 반대의 관점, 아니면 아예 다른 근거를 가져오더라고요.
“사람이 도구가 되어도 되냐”
“공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게 언제부터 당연한 거냐”
“형이 선택했다고 해서 그게 보편적 정의가 되냐”
이런 얘기를 계속 던지니까, 제가 평소에 하던 사고방식이 정면으로 멈춰 섰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늘 이렇게 살았거든요. '효율적인가?', '합리적인가?',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가?' 그럼 그게 정의다.
근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조금 불편했습니다. 아니 꽤 불편했는데, 이상하게도 통쾌했어요. 왜냐하면 속으로는 저도 알고 있었거든요.
'내 정의가 사람을 힘들게 한 적이 있었지..'
너는 설명할 때 화난 사람처럼 보여
이 친구 말고도 다른 동료 하나가 추가로 피드백을 줬습니다. 아주 결정적인 피드백이었죠.
“형.. 형이 누구한테 설명할 때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을 혼내는 것 같아요.”
저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아니야. 나 그때 열정적으로 알려준 거야.”
“그 사람이 모르니까, 더 잘하라고 얘기한 거야.”
“나는 도와준 건데?”
그런데 그 친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형은 좋은 의도로 말하는데, 듣는 사람은 압박감이 느껴질 수 있어요. ‘이렇게 해야 돼’가 강하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예전에 들었던 말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같이 일하기 어렵다더라."
“기술은 믿음직한데 편하진 않다더라.”
그동안 저는 그걸
“내가 진지하게 해서 그렇지 뭐.”
“나는 대충 못하지.”
이렇게 넘겼는데 이 피드백을 듣고 나니까
"아.. 이게 내가 사람을 ‘옳게’ 대하는 게 아니라 ‘힘들게’ 대하는 거였구나.”
이게 이해가 됐습니다. 그때부터였어요.
“이게 그냥 성격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다.”
“혹시 내가 모르는 무슨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이 생각이 슬그머니 올라온 게.
그래서 결국 병원을 찾았습니다.
신경정신과, 그리고 MMPI-2
병원에 가서 의사가 “어떻게 오셨나요?”라고 묻더군요. 보통은 여기서 “잠을 잘 못 자요”라든지, “불안해요”라든지, “우울해요”라는 식으로 말할 텐데 저는 조금 다른 케이스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설명을 하면 사람들은 혼나는 것 같대요. 저는 그런 의도가 없거든요. 그런데 주변에서 같은 얘기를 계속하니까 제가 뭔가 잘못된 건가 싶어서 왔어요.”
의사는 차분하게 듣더니 “그럼 인성검사를 하나 해봅시다.”라고 하더군요. 그게 바로 다면적 인성검사-2 (MMPI-2)였습니다. 문항이 500개가 넘는, 꽤 긴 검사입니다.
“나는 때때로 이유 없이 화가 난다”
“나는 누군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느낀다”
“나는 나를 쓸모없다고 느낀 적이 있다”
이런 질문들에 차근차근 답해야 합니다. 검사를 다 하고 나니까 묘한 감정이 들더군요.
“여기서 뭔가 나오면 어쩌지?”
“진짜 내가 이상한 거면?”
“그럼 지금까지의 관계 갈등이 다 내 탓이라는 증거가 되는 거잖아.”
“그래도.. 알면 고칠 수 있으니까 해야지.”
2주 뒤에 결과를 들으러 갔습니다. 긴장도 됐고, 솔직히 말하면 약간의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이상한 거였어'라는 진단이 나오면 ‘이제부터는 치료하면 된다’라는 명분이 생기니까요. 그런데 의사가 한 말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모범생처럼 열심히 살아오셨네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사시면 됩니다.”
그 순간의 허탈함이란..
'아니, 그 말 들으려고 내가 500문항을?'
'내가 지금 이상하다고 느껴서 온 건데 왜 그대로 살으라는 거죠?'
이런 생각이 동시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이 말이 아주 정확한 말이었습니다. 의사가 말한 건 '당신은 병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당신이 겪는 문제는 성격이 이상해서가 아니라, 성향을 쓰는 방식이 경직돼 있어서예요.'라는 뜻이었거든요.
쉽게 말하면 이겁니다. 저는 원래 모범적으로 살던 사람, 원래 책임감이 강한 사람, 원래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고 싶어 하는 사람, 이게 병적 수준이 아니라 기질 수준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고쳐라'가 아니라 '그 기질을 좀 느슨하게 쓰세요'에 가까운 진단이었습니다.
그제야 보인 '당위적 사고'의 얼굴
그때쯤 제가 이해하게 된 게 하나 있습니다.
나는 “당위”를 너무 세게 쥐고 있었다.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게 옳다.
그건 아니지 그건 효율적이지 않다.
그건 팀을 힘들게 한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이 말들을 저는 ‘도움 주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은 ‘비난하는 말’로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당시 제 머릿속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옳은 게 있다.
그 옳은 걸 알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알고도 그렇게 안 하면 그건 태도의 문제다.
태도의 문제는 지적해야 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옳은 일을 하는 거다.
이게 전형적인 이분법적 사고예요.
'옳음 vs 그름'
'정의 vs 불의'
'효율 vs 비효율'
'해야 할 사람 vs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근데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깨달은 게 이거였습니다. 모두가 ‘정의’를 말하지만 모두가 같은 정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은 ‘가장 많은 사람의 행복’을 정의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지 않는 것’을 정의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기회를 공정하게 나누는 것’을 정의라고 합니다.
즉, 사람마다 출발점이 다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내 정의와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너 정의 아니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걸 그제야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때 이렇게까지 생각이 갔습니다.
“아.. 그러면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왜 나랑 일하기 힘들다고 하지?’라는 나의 분노도 사실은 내가 내 정의를 강요했기 때문에 생긴 반작용이었겠구나.”
다시 말해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회사 코드 이렇게 가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팀은 이런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정도 수준은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기준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기준이 다른 곳에 있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저 사람은 왜 자기 기준만 말해?”가 된 거다.
그래서 “같이 일하기 힘들다”는 평가가 나온 거다.
여기까지 오니까 비로소 그때 그 회사에서 “위에서 너는 같이 일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하셨어”라는 말을 들었던 이유가 설명이 됐습니다. 그땐 억울했는데,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정의를 조금씩 내려놓는 연습
그 후로 저는 그 친구와 자주 '정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떤 때는 회사 이슈를 그 책 프레임에다 대입해보기도 했고, 어떤 때는 육아 얘기를 도덕 철학처럼 풀어보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는 늘 저와 반대되는 견해를 하나씩 꺼냈습니다.
저는 늘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또 이상하게 그 대화가 재밌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대화는 '틀렸다'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이게 저한테는 굉장히 큰 전환이었습니다.
이전의 저는 “이렇게 할 거면 하지 말자.”, “그건 비효율이야.”, “그건 조직에 안 맞아.”, “그건 안 돼.”라고 말했다면 이후의 저는 “저 사람한테는 저게 중요한가 보네.”, “저 사람은 결과보다 과정에 의미를 두네.”, “저 사람은 팀보다 개인 시간을 먼저 두는구나.”, “저게 틀렸다기보다, 내가 중요한 걸 너무 세게 쥐고 있었구나.”라는 사고의 전환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예전에는 숨 막혀하던 사람들이 조금씩 말을 하더라고요. '아,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는 눈빛이 보였어요. 그걸 보면서 확신이 들었습니다.
“내가 바뀌어야 이 사람들이 내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거구나.”
내가 '내가 옳다'를 내려놓는 순간 사람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