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면서 종종 제 어린 시절이 떠오릅니다. 어떤 장면은 너무 선명해서,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마음 한 켠에 꽂혀 있습니다. 어릴 적 저는 무언가를 잘못 건드리면 크게 혼나는 편이었습니다.
특히 컴퓨터가 그랬습니다. 그 시절 집에 컴퓨터 한 대 있다는 건 꽤 큰일이었고, 비싼 전자제품은 건드리는 물건이 아니라 '소중히 사용하는 물건'이었습니다. 케이스 나사를 풀어 본다거나, 하드디스크를 한 번 바꿔 달아보겠다는 생각은 감히 꺼내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런 내색만 비쳐도 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거 비싸게 산 거야. 괜히 건드리다가 고장 나면 어떻게 할 건데.”
그 말 속에는 걱정과 불안과 경제적인 부담,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겠지요.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 순간만큼은, 제 작은 호기심이 '사고를 치려는 위험 요소'로 취급되는 것 같아 어깨가 움츠러들었습니다. 나사 하나 잘못 풀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고, 그 큰일의 무게는 언제나 ‘혼남’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잔소리를 한 번 하고 나면, 어머니는 조용히 뒤에서 이런 말을 건네곤 하셨습니다.
“뭐든 고장을 내봐야, 나중에 고치는 법도 알게 되는 거야. 괜찮아.”
물론 저는 태생부터 그리 대담한 편이 아니어서, 말 그대로 '쫄보'였습니다. 머릿속으로는 분해도 하고 조립도 해보고 싶은데, 막상 손이 나가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있었기에, ‘실수’가 곧 ‘죄’는 아니라는 걸 아주 조금은 배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쩌면 한 번쯤 망가뜨려 보는 경험도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 기억들이 나이를 먹어도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제가 아빠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컴퓨터를 하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날이 몇 번 있습니다. 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 휴대전화 화면에 아이 이름이 떴고, 수화기 너머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빠, 컴퓨터가 ‘삐.. 삐.. 삐..’ 소리 내면서 계속 꺼져. 다시 켜도 또 꺼져.”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는 파워, 메인보드, RAM, 그래픽카드, 이런 단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먼저 뛰쳐나간 것은 그런 기술적인 용어들이 아니라 ‘아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처럼 '잘못 건드리면 혼나는 존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먼저 올라왔습니다.
결국 저는 회사에서 반차를 내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이 옆에 쭈그려 앉아 상황을 하나씩 확인했습니다.
케이스를 열고, 먼지를 털고, RAM을 한 번 뺐다가 다시 꼽고, 케이블을 점검하고, 그래픽카드도 살짝 손을 봅니다. 대부분의 문제는 의외로 단순한 곳에서 나왔습니다. RAM이 헐겁게 꽂혀 있거나, CPU와 GPU, RAM 사이에 낀 먼지가 원인이었습니다. 그 몇 가지를 점검하면, 마치 떨던 아이의 기분을 따라가는 것처럼, 컴퓨터도 다시 조용히 부팅을 시작했습니다.
컴퓨터가 켜지는 순간, 아이 얼굴에 피어나는 안도감을 보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아이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이게 RAM이야. 네가 하는 게임이든 프로그램이든, 실행할 때 잠깐 머무는 공간 같은 거야. 지금은 이게 제대로 연결이 안 돼서 문제가 생긴 거고.”
아이가 전부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눈빛만 봐도 아직 낯선 단어의 행렬을 따라가기 버거운 티가 납니다. 그래도 저는 ‘RAM’이라는 단어만큼은 머릿속 어딘가에 꽂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해주곤 했습니다.
“이건 RAM이다, 램. 기억해 둬.”
그렇게 몇 번의 사건과 수리가 지나가면서, 아이의 머릿속에는 어렴풋이 컴퓨터의 부품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CPU, RAM, 그래픽카드, 파워.. 이름을 부른다는 건 존재를 인식한다는 뜻이니까요. 이름을 안다는 건, 언젠가 그 존재를 스스로 다루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회사에서 퇴근해 평소처럼 집에 들어갔을 때,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먼저 달려와 말을 걸었습니다.
“아빠! 오늘 컴퓨터 또 ‘삐삐’ 거리면서 꺼졌거든? 근데 나 혼자 고쳤어!”
아이의 말에 잠시 멈칫했습니다. 저는 아직 상황을 잘 모르는 상태인데, 아이는 이미 결론을 내린 듯한 얼굴이었습니다. 마치 게임에서 보스 몬스터를 혼자 잡아낸 날의 표정처럼요.
“어떻게 했는데?”
제가 묻자, 아이는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유튜브에다가 ‘컴퓨터 삐삐 소리 나면서 꺼짐’ 이렇게 검색했어. 그랬더니 어떤 아저씨가 RAM을 뺐다가 다시 끼워보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나도 케이스 열고 RAM 뺐다가 먼지도 털고, 다시 꽂았어. 그랬더니 켜졌어!”
아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컴퓨터 쪽을 바라보니, 케이스는 아직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팬이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아주 묘한 감정이 찾아왔습니다.
‘아, 이제 이 아이는 나 없이도 컴퓨터를 고칠 수 있게 되는구나.’
조금의 서운함, 꽤 큰 뿌듯함,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안도감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이제는 울면서 저를 찾기보다, 먼저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는 아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유튜브 검색창에 증상을 그대로 적어 넣고, 관련 영상을 하나씩 보면서 따라 하는 아이를 상상해보면, 참 재밌습니다.
저는 컴퓨터 케이스를 열어보기도 전에 먼저 아버지의 얼굴부터 떠올렸습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혼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손을 막았습니다. 끝내 시도하지 못한 채, 부품의 세계는 저에게 꽤 오랫동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이는 같은 문제를 마주했을 때 전혀 다른 순서를 밟습니다.
당황한다.
울지는 않는다.
검색한다.
따라 해본다.
그래도 안 되면 그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변화의 배경에는 분명 기술의 발달도 있습니다. 예전에는 '시도 자체'가 곧 큰 리스크였지만, 지금은 수많은 시행착오의 기록이 유튜브 영상 안에, 블로그 글 안에, Q&A 게시판 안에 남겨져 있습니다. 누군가의 실패와 성공이 데이터로 축적되고, 요령과 팁과 주의사항이 아주 구체적인 형태로 공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술만으로 이 차이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실수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기 때문에 가능한 변화라고 느낍니다.
“실수해도 괜찮다.”
“고장 내도, 우리가 함께 다시 고치는 방법을 찾으면 된다.”
이 말을 아이에게 직접 여러 번 하지는 않았지만, 컴퓨터가 고장 날 때마다 제가 보였던 태도들이 아이에게 조용히 스며들었을지 모릅니다. 큰일 난 표정으로 다그치기보다, "어디 보자, 어디가 문제일까?”라고 말하며 옆에 앉아 있었던 순간들이 말 없이 전달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실패를 대하는 태도가 그 사람의 성장 방식을 결정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부터 실수를 '능력 부족의 증거'로만 배우면, 도전 자체를 피하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반대로 실수를 '배움의 과정'으로 배울 수 있다면, 실패를 한두 번 겪었다고 해서 쉽게 주저앉지 않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완벽주의에 가까운 성향이 강했습니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말하지 않는다.”
“정말 정확하다고 느끼지 않으면, 알려주는 것 자체를 금지한다.”
이 태도는 책임감 있고 신중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행동의 빈도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부작용을 만들어냅니다. 누군가를 돕고 싶어도, '혹시 잘못 가르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입을 막아버리곤 했습니다. 그런 제가 상담과 책, 여러 경험을 통해 인지왜곡을 조금씩 회복해 가면서 얻은 깨달음은 단순했습니다.
“100% 완벽하지 않아도, 지금 이 시점에서의 최선을 나눌 수는 있다.”
컴퓨터를 고쳐주러 달려가던 아빠가 어느 순간, 아이에게 먼저 시도해볼 기회를 주고, 유튜브 검색이라는 도구를 믿고, 틀려도 괜찮다는 태도를 건네게 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변화일지도 모릅니다.
저품질 블로그, 에러 로그, 매번 실패하는 설치 파일, 핵심만 빼먹고 삽질하던 수많은 시도들.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이 하나의 공통된 마음에서 출발했습니다.
“나처럼 헤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이미 고생한 길이라면, 그 길을 뒤따라오는 누군가에게 작은 이정표라도 남겨주고 싶다.”
그래서 저는 에러를 해결하면 블로그에 기록을 남겼습니다. 검색 알고리즘과 싸우는 동안, 블로그가 ‘저품질’이라는 판정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글을 썼고, 문제 해결 과정을 세세히 적어 올렸습니다.
언젠가 낯선 누군가가 같은 문제로 검색창을 두드리다가, 그 글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작은 기대를 품고. 이제는 그 역할을 아이도 조금씩 이어받고 있는 듯합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며 문제를 해결한 경험, 자기가 겪은 오류를 나중에 친구에게 설명해줄지도 모를 그날, 그때 아이도 어쩌면 이런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요.
“내가 이렇게 고생해서 알게 된 거라면, 누군가에는 조금 더 쉽게 건네주고 싶다.”
유튜브 검색으로 컴퓨터를 고치는 아이를 보며, 저는 세대의 변화를 느끼는 동시에, 어떤 면에서는 변하지 않는 무언가도 함께 느낍니다. 도구는 바뀌었습니다.
저는 설명서를 뒤적이고, 게시판에 질문글을 올렸다면, 아이는 검색창에 고민을 그대로 적어 넣고, 영상을 보며 따라 합니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흐르는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
“다음에는 혼자서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도 알려주고 싶다.”
결국 우리가 배우는 이유, 고치는 법을 익히는 이유, 기록을 남기고 공유하는 이유는 조금씩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마음과, 누군가의 시간을 아껴주고 싶다는 마음이 뒤섞여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저는 아이가 컴퓨터를 고쳤다는 말을 들으면, 예전처럼 급하게 케이스부터 열어보지 않습니다. 대신 아이에게 먼저 묻습니다.
“어떻게 문제를 찾았어?”
“어떤 검색어를 쳐봤어?”
“다음에 비슷한 일이 생기면, 뭐부터 해보면 좋을까?”
그 질문들 속에는, 제 어린 시절과는 조금 다른 메시지를 담고 싶습니다. ‘네가 직접 시도해도 괜찮다. 고장 내도 괜찮다. 우리는 같이 다시 고치는 법을 배우면 된다.’ 유튜브 검색으로 시작된 작은 성공 경험이 아이에게는 하나의 신뢰로 남을 것입니다.
“나는 해볼 수 있는 사람이다.”
“실수해도 다시 고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가 자신의 아이에게 비슷한 말을 건네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아이가 어떤 어조로 그 말을 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이렇습니다. 아버지의 꾸중과 어머니의 응원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단 한 문장만큼은 꼭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실수해도 괜찮아. 그것도 배우는 과정의 일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