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의 경제학이라고 거창하게 시작해 봤지만, 사실 우정의 경제적 격차 또는 경제적 수준 차이랄까..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이 들수록 우정은 결국 경제적 차이에 의해서 결정 나고 소득 수준이나 경제적 수준이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더 가깝게 지낼 수밖에 없다고. 어릴 때는 별로 와닿지 않았던 말들인데, 요즘 들어 자주 와닿는 거 같은 이야기.
얼마 전 A가 월요일 아침부터 다급하게 링크를 보내왔었다. 지금 엄청 괜찮은 세일 품목이 있으니 하나씩 빨리 사자고. 절호의 찬스라고. 사실 월요일 아침은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큼 힘들고 피곤한 요일이기도 하고, 오전이라 약간의 진입 장벽도 있는 시간인데 A는 집에서 살림만 하는 입장이라 그런지 거기까진 생각을 못 한 듯했다. 그래도 뭐 워낙 친한 사이라 그러려니 하며 클릭해 본 링크에선 온갖 그릇들을 세일 판매 하고 있었다. 진짜 절호의 찬스긴 했다. 30%에서 70%까지 세일 품목이 다양했고, 그릇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릇들이었다. 그런데 세일을 해도 이게 얼마야,, 그릇 하나가 자그마치 내 월급의 4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A는 워낙 그릇이나 가구 등 아름다운 물건들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조예가 깊은 데다가 또 그런 것들을 소비하고 수집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경제사정이라 그런지 나를 배려해서 좋은 건 함께 나누자는 취지로 보낸 것 같았는데. 내 주머니 사정이나 K직장인의 월급까지는 고려하지 못한 듯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싶어 장난스레 "야~ 내가 사기엔 너무 비싸다 너나 사라~ 난 퇴근하고 나면 너무 지쳐서 햇반 꺼내서 대충 먹느라 저런 그릇 필요 없어." 라며 넘어갔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친한 사이고, A는 학생 때부터 씀씀이가 남달랐기에 뭔가 악의가 있다거나 배려가 부족하다던가 이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말 괜찮았다. 각자의 위치에선 안 보이는 것들도 있게 마련이니까.
이런 에피소드들은 우리 사이에 별 문제가 되진 않았다. 문제라면 내 마음이 문제였지.
A의 쇼핑 리스트들은 내 마음의 여유가 있는 날에는 "덕분에 이런 것도 구경하고 알게 되네?" 라며 우리의 대화거리를 풍성하게 해주는 주제들이 되었다. 반대로 내 마음이 힘든 날에는 "넌 팔자도 좋다 이런 거나 턱턱 사고,, 난 사무실에서 1년 내내 머리 싸매고 일해도 그런 건 못 사는데"라는 내 마음속 열등감이 되어 메시지를 조용히 못 읽은 척하는 날이 되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타인의 경제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또 친구라고 모든 걸 다 공유하는 것도 아닌데 내 사정이 이러이러하니 여기까지만 해줄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A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가 먹고 쓰고 사고하는 것들이 본인의 경제적 수준에서는 그냥 평범한 일상일 뿐인데 다른 사람을 위해 그렇지 않은 척하라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어릴 때부터 친했고 성인이 되고 경제적 차이가 더 벌어지면서 격차가 생겼을 뿐인데 단지 그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친구를 잃을 수도 없고. 내가 좀 쿨해질 순 없는 건가. 나 스스로가 못나 보일 때도 있고. 알쏭달쏭했다.
반대로 이런 경우도 있었다. 경제적 자유보다 인생의 자유가 중요했던 B는 아직까지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단기 계약직으로만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나처럼 차곡차곡 월급쟁이 생활을 10년 넘게 한 사람과는 또 다른 경제적 사정이 있을 것이다. B와는 대학생 때부터 친했던 지라 우리는 20대 중반까지 같이 여행을 자주 다니곤 했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함께 다녀온 여행 이후로 몇 년째 서로 여행은 같이 하고 있지 않다. 그 마지막 여행 당시 나는 연차가 제법 쌓인 직장인이었고 B는 n번째 자발적 퇴사 후, 몇 개월의 근무 기간 동안 모아놓은 자금을 알뜰하게 쪼개 쓰며 다음 직장을 물색하던 중이었다. 그 마지막 여행 내내 나는 B의 지휘감독 아래 가성비가 좋은 것들만 먹고 보고 움직여야 했다. 커피가 너무 비싸면 디저트는 시키지 말아야 했고, 관광지 물가가 조금이라도 반영된 것 같은 식사 메뉴를 고르면 안 됐고, 입장료가 있는 명소들엔 갈 수가 없었다. 저녁엔 근사한 바에서 한잔하고 싶었지만 택시비 절약을 위해 숙소에서 캔맥주로 만족해야 했다. 그 숙소는 또 어떠했던가. 난 여행에서 잠자리만큼은 편안한 곳을 고수하는 편인데, B의 강력한 주장으로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게 되었다. 숙박 어플을 통해 길거리에서 약 1시간을 뒤져 찾아낸 최저가 숙소였는데, 심지어 방에 화장실과 욕실이 없어서 공용으로 사용해야 했던 곳이었다.
여행 당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난 내내 여행비를 지출하는데 눈치를 봐야 했고 여행 막바지에는 피곤함과 아쉬움으로 거의 녹초가 되어버렸다. 그 뒤로 종종 여행을 가자는 B의 제안을 온갖 핑계로 피하곤 했었다. 지난 연말, B는 다시 나에게 해외여행을 제시하며 괜찮은 게스트하우스 몇 곳을 보내왔는데 난 결국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 이제 여행 가면 그래도 꽤 괜찮은 리조트나 호텔에서 자고 싶어."
여전히 B는 대학생 시절 우리처럼 몸은 조금 고되지만 가성비로 즐길 수 있는 배낭여행 스타일의 여행을 하고 싶어 했지만, 지금의 나는 1년 내내 힘들게 일하다가 잠시 짬 내서 가는 휴가에서만큼은 편안한 숙소에서 평소엔 하지 못하는 조금은 사치스러운 경험들도 해보고 싶었다. 우리는 이제 함께 여행을 하기엔 돈에 대한 가치가 서로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도 나는 A와 B 모두와 잘 지내고 있다. A는 여전히 본인에겐 일상의 소비지만, 내 입장에선 1년에 한 번 정도는 아주 큰 마음을 먹거나 무리해서 구매할 수 있을 법한 물건들의 링크를 보내온다. B와는 서로 여행에 대한 소비의 개념이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여행은 가지 않게 되었지만 대신 자주 만나서 식사하고 수다 떠는 정도의 만남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어릴 땐 영원히 친할 것만 같고, 무한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우리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각자의 경제적 상황들로 인해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작은 불편들이 생기는 게 씁쓸하기도 했다. 이런 관계들은 꼭 A와 B 사이에서만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만나면 마냥 즐겁고 편하기만 했던 우리 사이에 점점 경제적 차이들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려면 아무래도 비슷한 소비 패턴을 가진 친구들과 가는 게 편했고, 안정적인 직장이 있는 친구와 이직 또는 취업 준비 중인 친구들이 함께 모일 때면 어딘가 모르게 서로 대화 주제나 핀트들이 어긋나기도 했다. A나 B처럼 서로 이해하면서 적당히 건강하게 유지되는 관계들도 있었지만 사는 동네, 옷브랜드, 자동차, 직업의 종류 등에 따라 질투하고 오해하고 멀어지는 관계들도 생겨났다.
경제적 수준에 따라서 달라지게 되는 생활 반경, 가치관, 만나는 사람들, 소비하는 패턴까지.. 그건 또 그대로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니까. 그런 것들을 감수할 수 있는 우정도 있지만, 감수할 수 없는 우정도 있을 수 있으니까.
아마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나이가 들어가고 삶이 변해가면서 한 번쯤은 겪게 되는 일이 아닐까 싶다. 때로는 나보다 여유로운 친구로 인해 질투도 하고 열등감도 느끼고 만남 자체가 부담스러워지기도 하고 반대로 내가 조금 더 여유 있다는 이유로 다른 상대에게 불편함을 초래하거나 또는 내가 감수하기도 하면서. 그럼에도 아직까지 서로를 이해하면서, 우리 사이에 생겨나는 경제적 격차들에 대한 틈을 우정과 이해로 메꿔갈 수 있는 관계들이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살면서 생기는 많은 변수들, 그 변수들을 감수할 수 있는 우정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당연한 변화고 자연스러운 변화지만 또 우리가 어릴 때부터 쌓아온 우정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깃들어 있는 것이니까. 인생은 앞으로 끝도 없이 오르락내리락할 텐데, 그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맞춰가면서 버텨주는 우정이 있으면 너무 힘이 될 거 같으니까.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게 우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