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색머리 앤

일녀 씀

by 구황작물

지인이 얼마 전 제주도에 다녀오며 선물로 사 온 땅콩 막걸리 세병. 우도 땅콩 막걸리는 냉장보관도 필요 없어서 현관에 뒀다.


어제 퇴근해보니 프라이팬 옆엔 묵은지를 씻어놓은 것 몇 장과 부침가루 반죽 약간이 보인다. 요놈 봐라. 자연스럽게 현관으로 가 우도땅콩 막걸리 상자를 들췄더니 역시나 막걸리 1병이 안 보인다.


코로나 때문에 가게 문을 닫고 있는 엄마는 몇 달간 끌탕을 했는데, 한 보름 전인가, 갑작스럽게 장부 정리를 하더니, 알고 보니 돈 못 번 게 어제 오늘 일은 아니라며 요즘은 맘이 좀 편해졌단다. 읭? 어쨌든 어제는 “15년 만에 논다”며 웃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용돈이나 좀 보태줄까 싶어서 “노는 것도 해봐야 노는 건데, 계속 노는데 놀만 해?”라고 물었더니 엄마가 “아이고 노니까 세상 좋지~ 돈만 있으면 노는 게 머가 힘들어~”라고 대꾸한다.


어제 저녁 7시, 엄마는 묵은지를 씻어 부쳤고, 보온병에 커피, 우도 땅콩 막걸리를 담아 집 근처 공원에 갔다. 공원에서 가게 손님인 ‘지민 씨’(엄마는 지민 씨를 발음할 때 꼭 약간의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지민 씨는 그렇게 부르는 이름이다)를 만나서 벤치에서 그걸 나눠먹고, 시장통에 자리한 미용실에 놀러 갔다. 미용실은 이 동네 아줌마들의 놀이터다.


엄마가 아직 소꿉놀이를 좋아해서 다행이다. 빨강머리 앤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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