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녀 씀
만나고 나면 기분이 요상해지는 사람이 있다. 피해의식 때문일 것이다.
지난 금요일, oo를 만났다. 최근 너무 체중이 늘기 시작해서 다음에 보자고 했으나, 너무 우울하다는 그녀의 말, 가끔은 아파트에서 사는게 두렵다는 말, 언제든 뛰어내릴 것 같다는 말에 두려웠다. 그녀가 금요일 오후에 “칼퇴 가능?”이라고 왔을 땐, 이미 내 시간은 내 것이 아니었다.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 마저도 핑계다. 어쩌면 난 좀 우월한 형편에 있는 자로서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돌보는 나 자신에 좀 취해있었나.
oo는 회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수길을 한바퀴 돌아서야 자리가 있는 술집을 발견했다. 오래된 횟집으로 과거에 소개팅남과 한번 와본 기억이 있다. 늘상 밥사는 언니 노릇을 하는데, 우린 나이 차이가 좀 나고, 내가 사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런데도 불편한걸 보면 문제는 이 착취 당하는 느낌인 것 같다. 돈을 썼는데, 돈을 쓴 느낌이 아니고, 돈을 빼앗기는 느낌이 드는 이유. 이건 좀 있다가 밝혀보겠다.
대화는 항상 그렇듯 재미있었다. 그녀는 나름 호응도 잘하고 대화도 빈틈없게 잘 이끄는 편이다.
난 기억 나지 않지만, 대학 때, 공강이 되어 알바 전에 집에 가서 자려고 했는데, 마을버스에서 눈을 떠보니 다시 알바시간이더라 식의 나의 빛바랜 추억도 나름 공유하고 있다. 그녀 말대로 내가 정말 그날 마을버스에서 눈을 떠서 울면서 그녀에게 전화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녀가 말하는 연도도 약간 이상하다. 그녀가 20살일 때 난 이미 졸업을 했으므로.
어찌되었든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고, 어찌되었든 우리는 좋든 싫든 약 30여년의 세월, 또는 그 이상을 공유하게 되었으므로, 어떤 부분에선 여느 친구보다 친밀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직업학교에서 네일케어를 배우기 전에는 바리스타과정을 배웠고, 이후엔 한식조리사 과정을 배우고 심지어 자격증을 땄다고 한다. oo의 모친은 oo이 서울대라도 붙은 듯이 자랑스러워 하고, 칭찬했다고 한다. oo의 엄마는 항상 그런 사람이다.
불편한 이야기도 했다. oo은 제 집에 운 좋게 며느리가 된 올케가 못마땅하고, 사람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집안꼴이 막장이라고 했다. 난 그녀가 올케 얘기할 때 너무 무섭다. 약간 사이비 종교를 믿는 아줌마 같은 무서운 느낌이다. 평생 울지 않던 oo의 모친은 요새 종종 운다고 한다.
두번째 불편한 얘기는 oo의 전남친 이야기다. 친동생과 나는 oo의 전남친에게 항상 더 많은 공감을 느껴왔다. 졸라 불쌍하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렇다.
내가 만약에 아주 가난한 사내야. 난 돈이 없고, 내 가족의 빚을 대신 갚아줘야 해. 매월 아주 아주 힘들 때가 있어 돈 때문에. 나에겐 여자 친구가 있어. 그녀는 돈을 잘 벌진 못하지만, 그녀의 가족은 그럭저럭 살아. 그녀는 좋은 집에 살지.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를 아주 사랑해. 그녀는 데이트 비용을 분담할 생각이 전혀 없어. 난 그녀를 사랑해. 어떻게 할꺼야?
다음 말을 이어가는데 소름이 끼치더라. 뭐를 어쩌겠어. 나라도 데이트 비용을 냈겠지.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것, 줄 수 있는 것은 다 줬겠지. 그래야 살겠지.
결국,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가장 큰 차이는 주지 않고도 의미를 찾을 수 있냐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내가 만약에 누군가에게 뭔가를 주고 빼앗겼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어쩌면 내가 저 사람에게 주지 않으면, 저 사람은 나를 만날 의미를 못 찾겠구나 하는 것이 핵심은 아닐까 하는 생각?
내가 비어 있을 때, 타인의 상태는 중요하지 않은 거야. 내가 비어 있었던 거야.
최근에 소개팅남이 뭘 먹을꺼냐며 선택지를 주었을 때 난 가장 저렴한 것을 골랐다. 2차 자리로 이동하며 내가 2차는 내가 사겠다고 하니, 소개팅남이 대체 왜 이러냐며, 대체 어떤 대접을 받아왔냐고 묻는 것이다. ㅎㅎ 나는 무언가 얻어먹으면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 했지만…
문제는 돈을 쓰고 안 쓰고가 아니라.. 내가 느끼는 결핍의 느낌이다.
oo는 항상 무엇이든 자기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가난한 남친에게 조차도, 그건 그저 자기 자신이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의식 때문이다. 왜 나는 그런 생각이 없나…
돈을 안 써서가 아니라, 적어도 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행복할 것이다. 그게 핵심이다. 감사를 생활화하는 것. 줄 수 있고 받을 수 있다는 것, 그 순환에 대해 행복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