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녀 씀
종종 찾는 분식집이 있다. 튀김을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반죽부터 새로 한 튀김을 만들어주기에 대기시간은 항상 길다. 운이 좋아도 십 분, 길면 이십 분 이상. 갓 튀겨진 튀김을 먹는 기쁨과 충분히 맞바꿀만하다. 하지만 주문을 할 때마다 아주머니는 만면에 난처함을 담고,
"이십 분 이상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라고 묻는데, 그 표정이 하도 진지하여 처음엔 완곡한 거절의 표현인가, 헷갈릴 정도였다. 이제는 아주머니를 떠올리면 그 표정이 떠오른다. 나는 어떤 표정으로 기억되는 사람일까.
2022년을 사는 현대인답게 기다리는 동안 대체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딴짓을 하지만, 의도치 않게 사장님 부부의 일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주인아저씨는 튀김과 떡볶이를 포함해서 모든 요리를 담당하고, 주인아주머니는 손님 응대 및 준비된 음식의 포장을 담당한다.
각종 조리도구의 수납 위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매장용 그릇과 포장 용기의 위치가 달라서 떡볶이 주문을 받으면 매대 아래 있는 용기에 턱 담아주면 간단한데, 포장 주문이 들어오면 아주머니가 뒤편의 조리대를 한 바퀴 돌아서 포장 용기를 가져와야 한다.
이 자리에서 십 년을 영업하셨으니 그럴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아주머니는 오늘도 포장용기를 가지러 계속 조리대를 몇 바퀴씩 돌았다. 생활 속 운동일까.
내 일용할 양식이 될 튀김을 기다리는 동안,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 한 분이 오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말끔한 할머니는 점잖고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내가 어딜 좀 가려고 나와 보니, 글쎄 카드지갑을 놓고 왔어. 어디 갈 수도 없고, 다시 들어가야 하는데 배는 고프고. 주머니 뒤져 보니 딱 천 원이 있는데, 순대 천 원어치만 주면 안 될까? 다음에 꼭 많이 살게."
아주머니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앞치마에 두 손을 문지르다가, 오늘만 그렇게 드릴게요, 원래는 안 돼요, 하며 순대 천 원어치를 담아내기 시작했다. 난 이미 그런 요구에 아주머니가 몇 번씩이나 친절하면서도 단호하게 거절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역시 옷차림이 중요한 걸까.
소매 끝이 해지고 옷감이 전체적으로 닳고 닳아 어딘가 모르게 반질반질 윤이 나는 야상을 입고 있는 나로서는 잠시 움찔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여기서 장사를 하며 아주머니는 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저런 요구를 받게 되는 걸까.
조리가 필요 없는 순대는 이내 할머니 앞에 대령되었고, 할머니는 식사를 시작했다. 그때, 뒤편에서 열심히 튀김을 튀기느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주인아저씨가 나와 싹싹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 다음에 꼭 돈 주셔야 합니다. 오늘만 그냥 드리는 거예요."
아저씨는 제 할 말을 마치고 돌아섰는데, 순대를 씹느라 한 박자 늦은 할머니가 노여움을 담아 내뱉었다.
"뭐라는 거야?"
주인아주머니는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조리대 뒤편을 빙 돌며 할 일로 돌아갔다. 할머니는 남은 순대를 싹 비우고 천 원을 내고 돌아갔다. 할머니의 얼굴엔 처음 부탁할 때의 상냥함은 사라졌고, 다른 언급은 없었지만 만면에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1인분에 삼천오백 원인 순대를 천 원어치만 달라고 할 순 있지만, 거저먹고 가는 인간으로 취급하는 건 참을 수 없었나 보다.
곧이어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주인아주머니는 예의 그 난처한 표정을 한가득 담아 너무 많이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이렇게 맛있는데 한 시간도 기다릴 수 있죠, 하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아주머니는 정말 난처한 걸까. 십 년 동안 한결 같이? 진정 난처하다면 새로운 영업 방식을 계발해야 하는 건 아닌가. 이 방식 -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즉석요리 방식 - 을 고수하는 한, 기다림과 난처함은 예정된 수순일 수밖에 없는데.
아주머니의 표정은 다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을 대할 때면 얼굴에 자동으로 장착되는 웃음, 그런 것. 기본적인 예의. 아주머니의 예의는 고운 품성을 드러내는데, 나는 그 난처한 표정 때문에 늘 난처하다. 나는 그보다 더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사래를 치기도 한다. 아이고,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하필 또 바쁘실 때 와서. 그 안엔 나의 진심도 있다.
문득 엄마가 떠오른다. 나는 금방까지 차 안에서 사납게 발톱을 세우다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다정한 부인으로 돌변하는 엄마 옆에서 늘 어리둥절했다. 아빠는 차 안에서도 차 밖에서도 심드렁했지만, 엄마는 변신이었다. 그 모든 것엔 진심이 있었구나. 태어나서 가장 오랜 시간 본 사람을 이해하는데,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린다.
떡볶이와 튀김을 사는 동안, 내겐 일행이 있었다. 나는 금방 내가 본 것들, 생각한 것들을 말할까 하여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아주머니의 난처한 표정을 보았니, 할머니의 마음은 모멸감이었을까, 어른들의 변신에 어리둥절했던 적이 없니, 등등. 하지만 어떤 것도 말하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표정을 말하면 별 걸 다 신경 쓴다 할 것이며, 할머니를 말하면 별 걸 다 봤다고 할 것이며, 옛 일을 말하면 별 걸 다 기억한다고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별 걸 다 생각하는 인간이다. 아마 그는 할머니를 보지 못했을 것이며, 모멸감에 갸우뚱할 것이고, 아주머니의 난처한 표정을 불편해하는 나를, 불편해할지 모른다.
온종일 주변을 관찰하다 보면 그 끝엔 물음표가 따라붙곤 한다. 왜 그랬을까? 그건 뭐였을까? 그 문장 부호를 느낌표로 바꾸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나의 물음표는 대화를 원할 뿐인데, 어떤 사람들은 정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는 듯했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했다 싶으면 종종 공격을 개시했다. 너는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세상만사가 불만이니?
왜 그들은 내 호기심과 질문을 자꾸 불만으로 받아들일까? 나는 또 물음표를 붙이고 만다. 그러니 나는 하려던 말을 속으로 욱여넣으며 생각한다. 이 모든 생각을 생산적인 무언가로 바꾸었어야만 하는데. 끊임없는 창작자가 되었어야 하는데. 누구도 보지 않는 글일지라도, 뭐라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제, 길을 지나다 낯선 여인들의 호쾌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누군지도, 사연도 알 수 없는 그들의 박장대소를 들으며 나 역시 함박웃음을 지었다. 웃음의 전염성 운운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내가 지나온 어떤 시절을 떠올렸다.
힘들었던 시절, 그럼에도 밤이면 모여 실컷 떠들고 낄낄깔깔거렸던 기억. 그때 우리의 유대. 나는 이제 다정한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과 웃음이 난다. 그 다정함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해도. 웃으며 이야기 나누던 그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걸.
글을 쓰려거든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라도 있어야지. 하지만 톨스토이를 읽는다 해도 누구나 의미를 찾는 건 아니다. 감히 대작을 쓰겠다는 말이 아니라, 미친년으로 보여도 뭐 어떻겠냐는 말이다. 읽는 이의 몫이다.
의미를 찾지 못해도 상관없으며, 그래서 낭비라고 느껴지면 안 보면 그만. 간단하다. 나는 왜 남의 몫까지 생각했나.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다. 그러니까 이제라도, 부지런히 써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