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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라킴 Jul 19. 2022

대학원생 엄마

나는 대체 누구인가.

예전에 공부한다고 다니던 회사를 때려칠 때,

(사실은 조직문화가 개판이라 그만둔 거지만)

진짜 마음에 안 들던 인사팀장이 나한테 말했다.


아…공부…여자들은 좋겠다. 하고 싶은 거 하다가 학위 따면 시간강사하면서 애 키우면 되는거고.”


그렇게 나는 하고 싶은 거나 하고 다니는 팔자좋은 자아실현녀가 되었다.


그래서 아니야? 라고 물어보면 할 말은 없다.

하고 싶은 건 맞는데, 그렇다고 팔자 좋은 건 아니니까


요즘엔 하도 대학원생에 웃픈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니까 대학원이 생각만큼 녹록한 곳은 아니란 걸 세상 사람들도 알지만. 그래도 아직 대학원생이라고 하면 팔자좋은 여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은 있다. 특히 기혼인 여자 대학원생, 아니 엄마 대학원생의 경우는 더더욱.


유학길에 오르지 않고 석사 때 지도교수님을 찾아갔을 때, 외국에선 더 좋고 넓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단다라고 나를 설득하던 교수님이 내가 결혼한다는 한 마디에 더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알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넌 여기서 끝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였다.


우리 과는 결혼한 여자선배가 학위를 받고 커리어를 이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특히 국내대학 학위를 가지고 아이까지 낳고서는.(내가 아는 한은). 학문은 굉장히 기존질서에 반하는 그런 학문인데 학계는 겁나 보수적이어서 그런 사람이 잘 없었다.


그래서 학위과정동안 항상 스트레스를 받았다. 성과에 대한 목마름,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항상 있었다. 누군가 나를 인정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시간강사나 하며 애나 키우는, 취미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도 일 인분을 할 수 있는 연구자라고. 다른 이들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나 혼자 그런걸 증명하도 싶어서 늘 초조했다.


프로젝트나 논문때문에 늦게까지 남아있으면 선후배들이 농담으로 “아 이제 집에 들어가셔야 하는거 아닙니까?”라고 했다. 그냥 농인데도 나는 꽤 진지하게 괜찮습니다, 제 남편은 다 이해합니다 이런 말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임신과 출산은 정말 다른 변수였다.


아무리 하려고 해도 하루에 책 한 자를 보기가 어렵다.

혼자 아기를 보는 초반에는 너무 힘들어서 죽을 것만 같아서 볼 수가 없었고, 일주일에 몇 번 도와주시는 이모님이 오고난 후에는 집다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할 수가 없고 하기도 싫었다.


주부 아닌 주부가 된 나는. 시간이 비면 내 일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일을 해야만 했다. 아기와 관련된 일(아기 이유식을 만들거나 아기용품을 알아보거나 하는 것 등), 남편이 일이 많아져서 못하는 잡일들을 해결해야되고, 거기다 가족행사 이런거도 챙겨야하고. 임신기간 동안 망가진 치아 이런걸 고치다 보면 시간이 어느새 10개월이 지나 있는 것이었다.


좌절스러웠다. 나는 주부도 아니고 워킹맘도 아니다.

무언가 읽고 써야하는데 pc를 켤 수 있는 시간도 제한적이다.(내 서재방에서 아기를 재워야하는 현실ㅠㅠ)

시간은 날마다 가고 학기도 날마다 가는데 못 끝낸

논문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면서

아기는 잘 크지?” “아기한테 잘해야돼” “넌 지금 공부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거야” 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래서 쓰려던 논문은 잘 돼가?” “얼른 복귀해서 공부해야지” “빨리 졸업헤야 얼른 자리를 잡지 않겠어” 라도 말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는 딸린 가족이 몇 명인데 얼른 졸업해야지” 졸업한 남자선배가 한창 학위논문을 쓸 때 모든 사람들이 해줬던 말이었다.


남편이 백수였다면 달랐을까. 아니 남편이 없었다면. 그럼 이럴 일도 없었을텐데. 그렇게 노력했건만 아기를 낳자마자 나는 그냥 취미로 공부를 하는 대학원생 엄마가 되어있었다.


차라리 이제부터 집중해서 좋은 엄마가 될 것이다 라고 포기하고 아기만 키우면 더 나았을텐데.

차라리 이제 돌아가야할 직장이 있었다면 나았을텐데.

나는 이도저도 아니다.


그동안 나도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프로젝트에 나를 갈아넣었던 지난날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어느날 넷플릭스에서 <베이비스:눈부신 한 해>라는 다큐를 봤는데 펑펑 울고 말았다. 뭐 남들이 아기의 발달이나 능력을 보고 신기해할 때 나는 그런걸 연구한 여성 학자들이 너무너무 부러워서 울었다. 나도 원래

저런걸 연구하는 사람인데…그걸 하는 대신 방구석에 앉아서 아기가 낮잠자는 동안 음소거 모드로 티비나 보면서 울고 있는 내 자신이라니. 정말 초라하다.


나는 대체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학문에 대한 열정, 자부심, 그리고 내 능력, 이런 건 사실 아무에게도 중요하지 않고. 나는 딸린 가족을 먹고 살리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자리를 잡아도 되지 않는, 그저 학위 과정서 낳은 아기를 예쁘게 잘 키우고 나중에 운이 좋으면 학위를 따서 쭐래쭐래 강의나 다니는 팔자 좋은 여성일 뿐이다. 시간강사 외에 다른 자리를 노리는 것도 다른 이에겐 엄청난 욕심처럼 보이겠지.


참나 그 쉬워보이는 학위 따는 일도, 시간강사 자리를 잡는 일도 애있는 나에게는 얼마나 뼈를 깎는 고통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솔직히 내가 애가 있든 없든. 가족을 먹여살리든말든. 한 인간으로 커리어를 쌓고 자리를 잡을 권리는 있는거 아닌가.


나는 깍두기다.

이도 저도 아닌.

깍두기.

게임에 참여는 시켜주지만 결코 일인분은 아닌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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