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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OL Nov 15. 2021

엄마

그냥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에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엄마를 만날 수 있다면 500만원은 낼 수 있겠다, 라는 실없는 생각을 말이다.


 더 이상은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적에 비하면 500만원은 참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금액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비루하고 하찮은 금액이 내 통장에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만약, 전재산을 걸어 엄마를 만날 수 있게된다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고맙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 아닌 그저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한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야윈 몸 앞에서 허겁지겁 라면을 먹어 미안하다는 말을,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손길로 잠든 나를 깨웠을 때 신경질을 부려 미안하다고, 좋은 카페 한 번 데리고 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열이 오른 뜨거운 몸을 더 많이 닦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음푹 패인 두 눈을 보며 더 많이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괜찮을 거라고 말해놓고는 결국 마지막에 눈을 감은 엄마를 흔들며 일어나라고 매달려서 미안하다고, 그래서 엄마의 가슴에 끝까지 안쓰러운 마음을 남기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해서, 그래서 내가 참 많이 미안하다는 말을. 나는 초라한 500만원을 주고 한없이 되뇌이고 싶었다.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엄마가 더 이상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처음 1년은 엄마의 흔적을 그렸고, 다음 1년은 인정하는 척을 했다. 이젠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구색을 맞춘 제사상을 준비하면서도 그저 붕 뜬 기분으로, 조금 쓰린 마음으로 누구를 위한 음식을 차리는 것인지 혹은 누구를 위한 안정을 기도하는 것인지 알고 싶지 않았다고 할까.


 죽음이라는 무서운 단어로 엄마의 부재를 인정하는 것보다, 그냥 나와 같은 하늘 아래 힘든 기억을 잊고서, 우리 모두를 잊어도 좋으니 내가 보았던 웃는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렇게 인정되지 않고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던 아픈 사실을 엄마가 떠난 지 3년이 지나서야 받아들이게 되는게.


 별다른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엄마의 제사상에 올릴 탕국을 끓이면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뿌연 거품을 걷어내면서 나는 그제야 엄마를 더 이상은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낮술에 취한 아버지가 마당에 놓인 소파에 앉아 경치를 내다볼 때, 음식 준비를 돕던 동생이 조금 늦게 씻으러 욕실에 들어갔을 때. 그래서 더 고요했던 그 찰나의 순간.


 밀가루 범벅이 된 바지를 입고 아무렇게나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내가 국자를 들고 국의 거품을 걷어내는 뜬금없는 순간에서야, 알겠더라. 이젠 정말 엄마를 보내줘야 한다는 것을. 엄마는 없다는 것을.


 덜컥거리고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심장이 다시 제대로 작동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여전히 거품을 걷어내고 어질러진 주방을 정리하고 묵묵히 바닦을 닦았다. 인정하기 싫었고 인정하지 못할 줄 알았던 것을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담담했고 많이 아프지 않았다.




 이전보다 엄마가 좋아했던 음식이 많이 올라간 제사상을 차렸다. 핫도그도 놓고 호박죽도 놓고, 맥주도 올렸다. 푸짐하게 차려진 상을 보면서 그저 많이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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