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내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시, 소설, 에세이를 통해 만난 인물들의 삶은 간접 경험임에도 직접 경험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오곤 했다.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 속 인물들은 속이 훤히 보이니 가공된 인물임에도 더 가깝게 느껴졌다. 불투명한 육체라는 장막 안에 속내를 감추고 살아가는 현실의 사람들에게 느꼈던 답답함이 해소되기도 했다.
놀라운 재능의 작가들은 '나'라는 살아있는 사람의 감각보다 더 생생하게 내가 살면서 느끼는 것들을 포착해 우리말의 섬세한 표현으로 묘사했다. '내가 예민한가?'라는 의문이 필요 없었다. 대부분의 소설 속 인물들은 나보다 예민했기에, 그 사실에 위로를 받았다. 읽다 보면 인물의 심리에 공감을 하면서도 내 감각이 얼마나 흐리터분하고 둔탁한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내 둔한 감각으로는 찜찜하고 불편하기만 할 뿐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는데,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인물들을 통해 어디에서 시작된 감정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알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묘하게 다행스러웠다.
내 인생에도 산전수전공중전이 있었지만, 장편소설의 주인공에 비하자면 그런대로 잔잔한 스토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을 통해 겪어보기 힘든 많은 사건들을 접하고, 나의 인생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기회를 가졌다. 때로 나는 주인공이 된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깊이 아프고 슬펐고, 진하게 행복했다. 타인의 삶이 내 몸을 관통한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떤 책들은 읽고 나면 읽기 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었다. 고뇌하는 인물들의 삶을 함께 살아내며 성장할 수 있었기에 직접적인 조언을 담은 자기 계발서보다 마음에 와닿았다. 문학은 나에게 다른 삶을 제안했다.
전형적인 삶을 벗어난 시도를하는 이들의 에세이도 정신을 일깨웠다. 헬렌&스콧 니어링,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에 오랫동안 빠져있었다. 욕망을 키워가며 성장해 가는 사회생활 초년생일 때부터 자급자족의 삶에 관심을 갖고 언젠가 실현해 보겠다 마음먹곤 했으니, 어쩌면 나는 태생적으로 평범한 삶을 살긴 그른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세속적인 성공을 다룬 스토리보다는 진짜 구원을 다룬 이야기들에 좀 더 끌렸다. 그런 작품들에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평범한 삶이 뭐길래, 애시당초 글렀다 싶었을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구 씨는 염미정을 다그치며 말한다.
"평범은 같은 욕망을 가질 때, 그럴 때 평범하다고 하는 거야. 추앙, 해방 같은 거 말고 남들 다 갖는 욕망.
너네 오빠 말처럼 끌어야 되는 유모차를 갖고 있는 여자들처럼."
재테크를 하고, 자녀교육에 열을 올리고, 명품을 사고, 호텔 수영장에서 인증숏을 찍으며... 남들과 같은 욕망 속에 사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무리의 움직임을 따라 우르르 움직이는 게 어쩌면 가장 안전한 길이다. 나도 안 해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리 욕망을 가져보려고 해도, 따라 해보려고 해도... 그런 것들은 내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소위 명품이라고 부르는 고가의 사치품을 사면 성공한듯한 기분에 잠시 신이 나기도 했지만 이내 사기 전과 똑같은 기분으로 돌아왔다. 통장 잔고가 줄어들고 집에 보관할 짐이 하나 늘었을 뿐이었다.
욕망을 채우고 나면 또 다른 걸 욕망하며 평생을 사는 일이 의미가 있긴 한 건가? 물욕이 많은 이들, 남들이 선망하는 차와 아파트를 사는데 몰두하는 이들은 늘 현실의 한계에 부딪히며 괴로워했지만 내 눈에는 참 건강한 사람으로 보였다. '갖고 싶은 건 많은데 돈이 없어 괴롭다'는 생각만 하며 살 수 있다니...
모두 다 같이 뛰는 트랙을 죽어라 달리는 사람들은 숨이 차겠지만 그 뿐이다. 성에 차는 기록이나 등수는 못 받더라도 힘들어죽겠다고 투덜거리며 뛰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 트랙을 왜 뛰어야 하는지, 결승점이 어딘지 의문을 갖고 트랙 밖으로 나와 깊이 고민해 목적지를 다시 설정하고, 달릴지 걸을지 멈추어 주변의 자연을 누리고 갈지 매 순간 고민해야 하는 사람에 비하자면 얼마나 심플한가.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살 수는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가능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다. 타인의 욕망, 집단의 욕망과 나의 욕망이 일치할 수는 없다. 적당한 타협으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다. 그게 가능한 사람들만이 그렇게 살 수 있다.
'인간은 모두 허수아비 같아. 자기가 진짜 뭔지 모르면서 연기하며 사는 허수아비.
어찌 보면 건강하게 잘 산다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질문들을 잠재워두도록 합의하고 사는 사람들일 수도... 인생은 이런 거야라는 거짓말에 합의한 사람들. 난 합의 안 해. 죽어서 가는 천국 따위 필요 없어. 살아서 천국을 볼 거야.'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미정의 독백은 얼결에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 늘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건강한' 삶을 위해 진짜에 다가서지 못하고(안 하고) 많은 것을 덮어둔다. 적극적인 합의에 가담하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재테크와 자녀교육에 열을 올리는 기성세대 모두가 전적인 합의에 가담한 허수아비라 생각한다. 진짜 자기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고 대다수와 같은 것을 욕망하며 평범하고 건강하게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삶 역시 치열하고 고단하다 하겠지만, 사실은 가장 수월한 길이다. 이해 안 되는 것들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니. 그런 전적인 합의가 가능한 사람들도 있는 반면, 그런 합의가 건강한 삶을 담보한다 해도 결코 하지 않는 염미정 같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 않는 것인지 할 수 없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지만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거쳐 선택했을 현명한 루트를 그대로 답습하는 데에는 인식이 필요 없다. 그럴 수 있다면 그 수월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염미정처럼 살아서 천국을 보는 쪽을 택해야 했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한정된 생의 소중한 시간을 허수아비가 아닌 인간으로 살고 싶을 뿐이었다. 진짜를 두고 가짜를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고, 꾸역꾸역 남들과 같은 욕망 안에 나를 구겨 넣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납득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