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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Jan 19. 2023

예쁜 도둑은 곶감을 산다

 드르륵드르륵

휴대폰 액정에 엄마의 번호가 떴다.

아씨 깜짝이야. 집어든 휴대폰을 빨래더미에 패대기쳤다.





엄마와 나는 이긴 자도 진자도 없는 무의미한 싸움을 3주째 이어가는 중이었다.

냉전기간은 모두들 배추와 씨름해야 하는 김장철이었고 본격적인 겨울추위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누가 먼저 지고 들어가나 하는 자존심대결은 아니었지만 선뜻 먼저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갈수록 마음을 졸였다. 김장하러 내려오라 말도 못 하고 혼자서 그 많은 걸 다해버릴까 봐.

'나는 김치 사 먹을 거니까 내 거는 하지 마' 이 말을 맘속으로 백 번 천 번 곱씹었다.

'여름에 잘 입었던 그 바지 겨울기모버전 나와서 자꾸 쇼핑몰 알람 울려대는데 사줄까?' 맘속으로만 천 번 물었다. 그렇게 속으로 외쳐대는 와중에 걸려온 전화였다. 엄마도 전화 걸기가 나만큼이나 껄끄러웠을 텐데 받지 않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동벨이 울리는 그 몇 초 사이에 엄청난 갈등이 스친 건 사실이다. 평소와 다름없게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연아 이번주 토요일에 김장하러 올래?

"엇 이번주? 으응 알겠어"(사실 약속이 있었;;)

"산이(동생)는 회사일 바빠서 못 온다더라"

"응 괜찮아 김서방도 바빠서 같이 못 가. 그럼 우리 둘이 해?"

"아니 아빠도 있잖아 셋이 하자"

"응 알겠어 그때 봐"





약속된 토요일이 왔고 엄마집으로 갔다.

아빠의 최애곡들을 들어가며 우리 셋은 차분히 김장을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빠가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잠시 자리를 비운단다. '아 그럼 엄마랑 나랑 둘만 남잖아?'

둘만 남겨져 배추에 양념을 처바르는 동안 혹시나 그 사건에 대해 말을 꺼낼까 봐 잔뜩 쫄았는데,

엄마는 평소처럼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역시나 노련하다.













나에겐 어린 시절 엄마에게 받은 아직은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 사과를 받았음에도 말끔하게 딱지가 떨어지지는 않는 부분이다. 엄마는 내가 성인이 되어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까지 줄 수 있는 모든 마음을 내어 주며 사과했고, 아프게 해서 미안했다 진심 어린 말로도 사과했다. 이번 역시 엄마가 하는 수많은 사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괜찮다는 말은 오고 가지 않았지만 서로의 맘 어딘가에 스며든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엄마와 나의 형태 없는 싸움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끝났다.







이게 한 달 반쯤 전 일이다. 내 안의 상처와는 별개로 난 엄마를 지극히 아끼고 사랑한다. 애증의 관계랄까.

이번엔 나의 마음을 드러내 보일 차례다. 그래서 다가오는 설엔 엄마가 좋아하는 걸  준비해 갈 생각이다.

나와 달리 심성이 곱고 보드라운 동생은 명절 때 용돈 이외에도 늘 선물박스를  들고 온다.

그럴 때면 엄마에게 말하곤 했었다.


"엄마 아들 잘 키웠네! 내보다 낫네? "

"그래 쟈는 맨날 뭐 하나씩 사 오드라"


난 예쁜 도둑이라서 엄마집에 가면 냉장고 먼저 열어젖혀 반찬 가져갈 거 없나 스캔이나 하고 챙겨갈 줄만 알았는데. 이 나이 먹도록 빈손으로 딸랑 가서 용돈만 계좌로 쓱 보내고 말이다. 이번에는 '니가 웬일로?'라는 엄마의 눈빛을 느껴봐야겠다. 엄마는 곶감이 그렇게 맛있다고 했다.






자 이제 은풍준시를 사러 나가볼까나.










사진 -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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