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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함존중 Dec 03. 2023

나는 오늘도 사과나무를 심는다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을 어느 대표의 일기장



1. 어제 대표들끼리 모임하는데 업계 1위 게임회사 출신 개발자가 


대표가 제일 노예다. 맨날 오봉들고 나르고 바닥 닦고... 내가 xx에서는 시급도 아니고 분당으로 급여받는 억대 연봉잔데...
(소매자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너무 웃퍼서 눈물이 났음 ㅋㅋㅋ큐ㅠㅠㅠㅋㅋㅋㅋㅋ 아무튼 이거는 대표를 해 본 사람만 뭔 말인지 안다. 페북에서 맨날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감사, 행복, 해맑 외치는 대표들, 오프에서 대표들끼리 모이면 다들 비슷하게 이래 귀엽다.


2. 나만 해도 인솔 땜에 토욜 아침 8시에 씻지도 못 하고  김포공항 왔는데 인솔할 직원 직계 가족의 부고로 아침부터 술 세트 팔면서  눈물 닦고 있닼ㅋㅋㅋㅋㅋㅋ 여기 하루 매출이랑 내 시급이 맞먹는데. 


3. "취약점을 드러내라"는 글들 많이 보는데 실제로는 드러낼 수 있는 취약점도 굉장히 전략적이고 선택적으로 해야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여자 대표라서 더 그런 것도 있고. 어떤 빈틈과 취약점은 굉장히 치명적이고 대표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세상의 노예다. 내가 비록 유명하지 않고 회사가 코딱지 만할 때 저지른 실수도 떼돈을 벌면 내 발목을 잡을 수 있다. 모든 통화는 녹음하고 내가 불리해질 수 있는 사안(특히 노동법)일수록 카톡이나 글로 남겨야 한다. 


4. 개고생을 해본 대표들일수록 겸손(?)해질 수 밖에 없는데 겸손이랑 자존감이 낮은 건 다르다. 누군가가 신제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면 그 자리에서 성향이나 지금 이 사람의 성공 척도가 그대로 드러난다. 어떤 대표들은 감놔라 배놔라 하면서 쿠션 멘트와 함께 취약점과 개선점을 지적하는데 대부분의 조언을 가장한 고나리질은 당사자에겐 무쓸모인데다 불쾌감만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5. 그 친구는 당신이 했던 대부분의 고민을 이미 했을 것이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했을 것이나 여러 이유로 그렇게 밖에 되지 않은 경우가 당신이 지적질한 근거의 전부다. 당신이 고나리질 하는 시간의 몇천배만큼 그는 밤새 일했을 것이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당신이 지적하지 않아도 그 서비스나 제품은 실패할 것이다. 실패하면 또어떤가? 다시 하면 되지. 내가 아닌 그 어떤 크고 작은 유니콘 대표도 한번에 성공한 사람은 없다. 


6. 만약 충고하는 그 마음이 진심이라면 개선할 수 있도록 돈을 줘라. 그 대표가 직접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 당신의 충고는 개소리다. 또한 당신 눈에 보이는 제품의 헛점은 모두 그 사람이 이전에 고민해 본 결과의 최선이라는 걸 잊지 말길. 




7. 술펀을 창업하기 전 3년, 창업 후 5년 간 내 몸에 베인 강사, 교육, 컨설턴트로서의 충고 DNA를 경청과 인정, 칭찬으로 바꾸기까지 3년이 걸렸다. 계기가 코칭이었고 지금 나는 스스로 코치가 되었다. 편하게 좀 살지, 맨날 사서 고생하고 스스로를 한계까지 계속 몰아붙이는 내 자신이 좀 구려보일 때가 있긴 한데, 내가 상상하는 세계를 위해 꿈을 꾸지 않고 현실을 마주하면 인간이라는 존재에게서는 슬픔과 연민 밖에는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비록 세상이 실제로 바뀌진 않더라도 사과나무를 심을 수 밖에 없는 게 바로 매트릭스 안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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