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피아절에가다 Nov 11. 2024

나를 만나기 위한 여정

이 여정의 끝, 또 다른 시작이 되길…

13년 전 어느 봄이었나 봅니다. 볕이 따스해 자꾸만 눈이 감기던 어느 봄날, 남편과 저는 난생처음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었습니다. 당시 대학생활의 꽃처럼 여겨졌던 그 흔한 배낭여행 한 번 가보지 못한 저희는 오랜 연애 후 부부가 되어서야 둘이서 유럽 여행을 가게 되었답니다. 마음만은 대학생들처럼, 나름의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런던과 파리, 두 도시를 경험했었습니다. 그때가 아마도 서른을 갓 넘긴 파릇파릇한 시절이었습니다.


당시도 런던 in, 파리 out의 일정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런던 히드로 공항과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은 저희 인생에서 함께 점찍은 공항 중 하나가 되었고요. 영국의 어느 해변 세븐 스프링스의 풍경과 세느강변 테라스에서 즐긴 에스프레소는 잊을 수 없는 우리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이후로 가끔 아주 가끔 휴대폰 사진첩에 겨우 겨우 살아남은 그때 사진들을 넘겨보며,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말에 격하게 수긍하며 지내기도 했죠. 아이를 낳고는 더더욱 현실 속에서 허우적대며 지냈죠. 겨우 사진밖에 남지 않은 저희의 추억을 넘겨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으니까요.


인생이 그렇잖아요. 한 번도 어려운데 두 번은 더 어려울 수 있는 게 우리 삶이니까요. 그곳을 과연 다음에도 기약할 수 있을지, 가능하다면 그게 언제가 될 수 있을지, 두 번째 런던과 파리는 저에게 알 수 없는 미지의 시간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물론 말은 입버릇처럼 하고 다녔죠. "우리 결혼 10주년으로 꼭 다시 가자"라며. 그리고 "우리 결혼 10주년으로 다시 갈 거야"라고 말하고 다니기도 했죠. 말에도 기운이란 게 있어, 입버릇처럼 하는 그 말에 좋은 기운이 달라붙어 꼭 이뤄질 것만 같았거든요.


조금, 아주 조금, 약속했던 시간은 지났지만 13년 후 그곳에 다시 다녀왔습니다. 이번엔 둘이 아닌 셋이서. 둘도 아닌 오직 하나의 몸처럼 거닐었던 그때처럼, 이제는 하나 같은 셋이서 말이죠. 첫 번째 파리가 좋았기에 기필코 두 번째 파리를 알현하고자 그렇게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는데(심지어 불어를 잠시 공부하기도 하면서..), 의외로 두 번째 런던이 참 좋았다는 것은 이번엔 하나 같은 셋이 함께 했기에 그랬던 건 아닐까 합니다.


왜냐면 말이죠. 꿈을 닮아가는 곳처럼 느껴졌던 옥스포드는 아이에게 아이 스스로의 미래를 꿈꾸게 했고요, 런던 내셔널 갤러리 한쪽에 자리했던 그랜드 피아노는 그곳에서 꼭 연주해보고 싶다는 아이의 또 다른 꿈이 되었고요. 또 코벤트 가든 어느 중정에서 혼이 빠지도록 '캐리비안의 해적' 곡을 신나게 연주하던 바이올린 4중주 연주가들의 모습은 아이의 음악 세포를 충분히 자극시켜 주었으니까요.


둘이었던 그때는 지금을 알 수 없었겠죠. 불변하리라 생각되었던 것들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첫 번째 파리가 좋았듯, 두 번째 파리도 더 좋을 것이라 기대하며 이 날만을 기다렸겠죠. 10년 후 다시 만날 파리를 가슴에 품고서 말이죠.


그런데 말이죠. 세월의 힘을 경험했다고 할까요.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목격했다고 할까요. 세월은 흘러 다시 이곳, 변함없는 이곳에 변함없는 우리가 당도했고, 우리의 여행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때처럼 말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다운 이곳에서 말이죠.

유일하게 달라진 것은 우리라는 범주에 있었죠. 둘이 아닌 셋. 너와 내가 아닌 너와 나 그리고 또 다른 너. '우리 둘'이 어느덧 '우리 셋'이 되어 함께 하는 이번 여행에서 저는 세월의 흐름이란 것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불변하게 사랑하리라 여겼던 나의 파리가 그냥 파리가 되었고, 그냥 런던이 비 오는 날의 운치까지 사랑하게 된 런던으로 바뀌었으니 말이죠. 또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르는 낭만적인 사랑의 본질로 기억하던 프랑스가 이제는 그냥 프랑스가 되고, 콧대 높고 젠체하는 나라 영국이 이제는 신나는 ‘캐리비안의 해적’ 영화음악으로 기억될 것이니 말이에요.


여행은 그런가 봐요. 특히 시간이 흘러 과거 마음에 담았던 그곳을 다시 가보는 경험은 세월의 흐름을 인식하게 하고,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작지만 크게변화하고 있는 나를 인지하게 하는 일인 것을요. 인생이란 여정에서 내가 얼마큼 달라져있는지, 혹은 얼마큼 걸어와 있는지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잣대 같은 것 아닐까요. 지도 위에 하나의 점을 찍고 다른 점들과 이어가다 세월이 흘러 잠시, 찍었던 점으로 다시 돌아가 머물러 보는 경험 같은 거요. 어느 밤하늘 문득 고개 들어 그동안 내가 머물었던 별들을 하나 둘 이어가는 경험 같은 거요.


또다시 기약을 해보려 합니다. 10년 후 변함없는 그곳에서 지금보다 아름답게 채워져 있는 미래의 나를 만나는 여행을 저는 또 기다려보려 합니다.

이전 12화 마지막 에스프레소, 파리의 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