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올해 아이는 이제 6학년.
초등학교 최고학년이라는 자부심이 남다르다.
새 학년 시작의 긴장감보다 설렘이 더 커 보이고, 개학 첫날 하교 후 친구와 잠시 담소를 나누고 온다며 통화 목소리에 즐거움이 배어있다. 올해는 같은 반에 아는 친구가 꽤 있다며 초등학교의 마지막 학년답게 환경의 익숙함이 곳곳에 묻어난다. 다만 새로운 담임선생님, 새로운 교실, 새로운 교과서만이 과거 5년의 익숙함을 조금 덜 느껴지게 만든다.
이번 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최고 학년을 맡은 선생님답게 부모에게 알림장을 공유하지 않는다. 이것이 부모인 내가 올해 덜 익숙한 부분 중 하나다. 사실은 최고학년 학부모인 이 엄마는 양가감정으로 현재 혼란스러운 와중에 있다. 아이들이 혼자서 준비하게끔 도와주는 감사한 선생님, 한편으로는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몹시 궁금하게 만드는 선생님. 어찌됐든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노력 중이이다. 아이의 자립을 도와주면서 엄마의 자립까지 도와주는 감사한 선생님으로 생각하기로.
월요일 아침이 밝았고, 치통으로 늦잠을 자는 아이를 굳이 깨우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유치 어금니가 흔들리기 시작했나보다. 주말 외식으로 아이는 고기를 실컷 씹어대더니 그날 저녁부터 훨씬 흔들리는 어금니 하나를 뽑고 싶어 안달이 나있다.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해야 하는 아이의 강력한 몰입도는 입 속 이물감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흔들리는 이를 어찌 못해 안절부절. 매번 혼자서 제 손으로 뽑던 다른 치아들과는 차원이 달랐던지 한쪽 턱을 잡고 치통을 호소하며 스스로 다짐한다.
"이걸 혼자 뽑으려다 뽑히지 않아 다시는 뽑지 않기로 했어!"
월요일까지 하루가 더 남았는데... 이 아이, 입 속 이물감에 또 얼마나 몰입을 할지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주말을 버텼다.
그런 아이를 평소처럼 깨울 수 없어 월요일 아침 혼자서 거실을 두리번거렸다. 며칠 전 경칩이었고, 따스한 봄이 오고 있으며 아침 7시가 되니 이제 훤히 밝아진다. 아이 책상을 슬쩍 살펴보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것들..
스프링 노트들.
아이의 손으로 꾹꾹 눌러쓴 영어 노트들.
총 5권. 이제 막 쓰기 시작한 노트까지 6권.
하나 둘 펼쳐보니 아이의 소중한 매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매일 한 두 문장씩 써 내려간 아이의 소중한 과거들. 그것들이 오늘 아침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그때는 왜 울컥하지 못했을까.
그때는 왜 소중하게 여겨지지 않았을까.
그때는 왜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그때는 왜 왜 왜...
수없이 많은 왜들이 내 머릿속에 떠돌며 마음속에 자책과 후회의 웅덩이들을 만들었다.
휘리릭 갈겨쓴 글씨체를 보고 며칠 참고 있었던 말이 결국 입 밖으로 튀어나오던 순간들,
3번씩 쓰는 것이 과제인데 꼭 한 두 번씩만 쓰고 넘어간 것들 때문에 아이의 조급함을 지레 짐작하며 거슬려하던 순간들,
소리 내어 말하며 써야 하는 문장들을 대충 써버리고 노트를 덮어버리는 아이의 뒤통수를 째려보던 순간들...
그 수많은 순간들이 지나니 내 눈앞에는 아이의 소중한 그 노력들의 순간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 눈으로 그 노력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며 과거 내가 아이에게 가졌던 감정들을 다르게 채색하려 애쓴다.
휘리릭 갈겨쓰지 않았던 순간들도 많았구나!
어떤 날은 문장이 길어서 한 번만 쓴 거구나!
어떤 날은 학교 가기 바빠 아침에 빨리 끝내려 애썼구나!라고..
대충 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을 것이고, 대충 할 때조차 그럼에도 매일 하려 노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엄마는 시간이 꽤 흘러 깨닫기 시작한다.
부스스한 얼굴에 까치집 머리를 하고서 방에서 깨어 나오는 아이를 안아주었다. 아이의 얼굴에 내 마른침을 묻히며 뽀뽀 세례도 잊지 않았다. 언제까지 너의 얼굴에 내 마른침을 묻힐 수 있을까. 그 순간이 언제 올지 손으로 꼽을 시간에 지금 당장 더 많은 침을 묻히고 안아주는 게 낫지 않을까.
아이는 책상에 털썩 앉아 자신이 애쓴 흔적들을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 뒤통수에 나는 또 내 바람을 얹고 있다.
'아들아, 그동안 기억하지 못했던 소중한 너의 과거를 만난 기분이었다면 참 좋겠다...
그리고 흔들리는 그 어금니 좀 괜찮니? 조금만 참고 하교 후에 어서 치과에 가보자… 이 또한 지나간다… 잊고 있었던 소중한 과거를 지금 만난 것처럼 이 또한 소중한 과거가 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