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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쏘사 Aug 23. 2022

술酒님 02. 한라토닉

을지로의 난亂






내가 을지로의 난亂을 일으킨 것은 2019년 연초로 추운 겨울이었다.


왜 이리 선명히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다른 건 기억 나지 않아도 내가 그 날 흰색 숏패딩을 입고 나갔던 것은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래 절대 잊지 못하는 이 날, 내가 왜 을지로에서 난을 일으키게 되었냐 하면…


졸업한 대학 동기들끼리의 모임이었다. 인원은 10명 정도였던 것 같다. 경기도 일산과 수원, 양주, 서울 등 다양하게 흩어져 살던 우리는 이날의 모임을 위해 삼삼오오 을지로로 모여들었다. 근황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다 보니 분위기는 자연스레 무르 익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한 명이 '문제의 게임'을 터뜨렸다.


문제의 게임은 지금의 밸런스 게임과 비슷한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주제를 던진 후 정해진 시간 이내로 대답을 해야하는데, 하지 못하거나 하기 싫은 경우 술잔을 비워야하는 룰이었다. 대학 동기 모임답게 주제는 평이한 것부터 시작하여 수위가 높은 것까지 아주 제 멋대로 넘나들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마구잡이로 웃으며 진행되었다. 한 녀석이 폭탄 같은 주제를 던지기 전까지는.


"△△△ 교수님이랑 키스할 수 있다."


△△△ 교수님이라 함은 대학교 전공 교수님 중 한 분이셨는데, 갑자기 나온 그의 성함에 우리는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새끼 미쳤나 봐!"


폭탄과도 같은 그 말에 우리는 발을 굴러대며 까악까악 웃었다. 그 문제에 대답을 해야하는 친구는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우리의 게임 주제가 이런 쪽으로 변질된 것은.


학과장을 비롯해 다른 교수진들의 이름이 속속들이 나온 것이다. (교수님들 이 글을 빌어 죄송합니다.)


익숙한 이름이 섞인 주제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는데, 어떤 이는 극혐했으며, 어떤 이는 나름 진지하게 고민했고, 어떤 이는 그저 흐린 눈으로 한 귀로 흘렸다.


문제는 그런 주제가 나한테 많이 왔다는 것인데, 나는 처음엔 극혐하다가 나름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그러다 또 흐린 눈으로 잠시 멍을 때리는 복합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보니 정해진 시간 초과는 당연했으며, 술잔은 비워지길 무섭게 채워졌고, 채워지길 무섭게 비워졌다.


그때 내 앞에 놓인 술의 종류는 다양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꿀주(소주 9: 맥주 1) 한잔, 쏘사(소주 5: 사이다 5) 한 잔, 한라토닉(한라산 6: 토닉워터 4) 한 잔, 두 잔, 세 잔….


앞에 닥칠 미래가 어떨지도 모르고 난 신나서 계속 비워댔다. 그러던 와중 폭탄 같은 주제를 시작했던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가봐야 돼."


우리는 단체로 야유했다.


"술자리를 개판으로 만들어놓고 어딜 가!"

"야, 앉아라. 너가 벌여놓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막차야? 막차 아님 앉아라."


애인이 데리러 왔대! 가볼게! 우리의 야유에도 아랑곳 않고 녀석은 떠나버렸다. 순식간에 남겨진 우리는 뻔뻔하게 가버린 녀석을 한마디씩 욕해주곤 다시 게임에 돌입했다.


이때부터 나의 정신은 알딸딸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맹세코 취하진 않았었다. 술집에서의 기억은 다 나기 때문이다. 그러다 시간이 10시를 훌쩍 넘어갔고, 멀리 사는 친구들이 많던 이 모임은 슬슬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이제 일어날까?"


친구 한 명이 먼저 운을 띄웠다. 나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리고 이것이 이날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눈이 번쩍 떠졌다.


눈앞에 보이는 천장은 우리집 천장이요, 내가 누워있는 곳은 이불 위니… 나 어떻게 집에 왔더라?


끊겨진 기억에 정신이 아찔했다. 이렇게까지 두동강 나버린 기억은 오랜만이었다. 아 진짜 제발.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머리가 아파오는데 불현듯 어떤 기억 하나가 스위치처럼 켜졌다.


마치 인셉션에서 나왔던 꿈 속의 꿈 속의 꿈 장면처럼 내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도 넘어져있고, 또 다시 일어나도 넘어져있는… 아찔한 기억이. 꿈이 아니었나? 진짜인가…? 기억나는 장소는 화장실 칸 안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계속 구르고 있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떠 다리를 보자 선명히 자리 잡은 멍자국들에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 도대체! 어제! 뭐했던 거야!!!!


서둘러 옆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들어 카톡을 열어보니, 단톡방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박쏘사 ㅋㅋㅋㅋㅋㅋㅋ' '박쏘사 죽여버릴거야' '잘 들어갔냐?'류의 메시지가 번갈아가며 쳐져 있었다. 그리고 새벽엔 내가 보낸, 기억도 나지 않는 카톡도 있었다. '으 ㅇ ㅋ' 아마 집에 왔다는 대답이었겠지…. 


나는 그것들을 손으로 내려 주르륵 훑어보곤 답장을 보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들. 그냥 다 죄송합니다.


현타에 절어있을 새도 없이 이때도 파리바게트의 노예였던 나는 부랴부랴 출근 준비를 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당시 일했던 파리바게트에 술귀신이 붙어있던 게 분명하다. 이곳에 다닐 때만 해도 생긴 큼직한 사건이 몇 가지나 된다.)


출근을 해서 어찌저찌 일을 하고 있던 와중 어제 같이 마셨던 친구에게서 카톡이 왔다. 나의 어제 행동이 담긴 영상이었다. 브이로그처럼 아주 기가 막히게 편집까지 해서 보내주었다. 나는 한 가운데에 자리한 재생버튼 뒤로 보이는 나의 모습에 다시금 눈을 질끈 감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그 영상이라도 간절했다. 술집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화장실에서 넘어진 기억 외에는 모조리 다 증발해버렸기 때문이다.


재생버튼을 눌렀다.


영상 초입부터 난 우리가 술을 마셨던 술집 앞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일시정지를 눌렀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이었다. 하… 한숨을 내쉰 나는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널브러져 있다가 애들이 일으켜 끌려가고, 끌려가는 와중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다며 울부짖는 나. 그런 나에게 조금만 버티라며 다독이는 애들……. 내 기억 속에 남은 문제의 화장실은 지하철 화장실이었다. 정말 울기 직전의 얼굴을 한 나는 친구에게 이송돼갔고, 드디어 칸에 들어간 나는 위에 말했던 기억처럼 내 토를 밟고 넘어지고, 일어섰는데도 또 넘어지고, 오뚜기처럼 또 일어서고 했던 것이다.


정말 큰 문제는 내가 그 날 입었던 패딩이 흰색 패딩이었다는 것.


화장실에서 나온 내 몰골을 애들은 다 봤을테지. 그래도 이런 나를 거두어 택시까지 겨우 붙잡아 보내주었구나….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현타가 내 온몸을 휘감았다. 이건 애들이 괜찮다고 말해도 사라지지 않을 깊숙한 현타였다. 이 영상은 내 삶의 본질을 고찰하게 만들었다.


나는 왜… 살까…?


쉽게 가시지 않는 현타를 어깨에 짊어지고 퇴근길에 집이 아닌 집앞에 위치한 한강에 들렀다. 벤치에 앉아 물결에 바스러진 햇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물결 위로 아까 보았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그리곤 주식투자자들처럼 '~걸무새'가 되었다.


적당히 마실 걸. 꿀주 마시지 말 걸. 빈속에 한라토닉 때려붓지 말걸…. 


하지만 후회한들 어찌하리오.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어제의 나를 거둬준 친구들에게 싹싹 비는 것밖에 없었다.


이 글을 빌어 다시금 애들에게도 외쳐본다.


친구들아. 아직도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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