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던져주는 글감에 대하여

글이 안 써지는 날에 생긴 이야기

by 민주

이상하게 토요일은 떠오르는 글감이 없다. 감성적인 분위기가 있어야 글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요즘의 토요일은 그럴 틈이 없다. 날씨가 풀리면서 외출이 잦아졌고, 주말은 밀린 집안일을 해내는 시간이라 새벽부터 일어나 집안을 정리하고 나면 어느새 외출 준비로 하루가 흘러간다.

그렇게 밖으로 나와 차에서 이동하는 길에 핸드폰을 잡고 오늘의 글을 쓸 준비를 했다. 하지만 외출 준비만으로도 지쳐서일까, 그저 놀고 싶은 마음에, 창작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싶어서일까. 한 단어도, 한 문장도 머릿속을 스치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의 글감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보았다. 바로 지금도 옆에서 열심히 운전 중인 나의 남편. 봄을 '정차 시에 엔진 꺼짐 기능이 다시 돌아오는 계절'이라 표현하는 독창적인 표현력을 지녔기에 기대감에 차 오늘의 글감 아이디어를 얻기로 했다.

나 : 오늘 쓸 글감 아이디어 좀 줘봐.
남편 : 벚꽃? 개나리? 이틀 만에 사라진 개나리에 대해 쓰는 건 어때?
나 : 너무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 같은데
남편 : 어째서? 개나리가 사라져서 아쉽다는 감정으로도 한 편을 써야지!

내가 남편보다 이성적인 사람이거나, 남편이 아내의 글솜씨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그래서 그냥 그가 던져주는 글감을 그대로 받아 적기로 했다.

1. 자동차는 좋아하지만 움직이는 자동차는 기겁하는 남자아이에 대하여
2. 이틀 만에 사라진 개나리에 관하여
3. 세 달째 매주 타고 있는 세종포천고속도로에 관하여
4. 110km 구간에서 85km로 달리고 있는 앞차에 관하여
5.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으로 가는 길과 청주로 가는 길을 비교하기
6. 괜히 차로를 변경했다가 오히려 늦어진 건에 관하여
7. 꼭 같은 터널을 지날 때마다 잠드는 우리 집 꼬맹이에 대하여
8. 고삼휴게소는 왜 고삼일까?
9. 인생은 운전과도 같다.

마음에 꽂히는 글감은 없었지만, 계속 "더없어? 더 이야기해 줘"라며 남편에게 물었다. 그러다 점점 침묵을 지키며 고뇌에 휩싸인 남편의 옆모습을 보니 재미있어졌다. 마음에 드는 글감은 찾지 못했지만 실없는 소리로 티키타카하는 대화가 반가웠다. 점점 난처해하는 남편이 귀엽기도 하고 말이다.

회사 다니랴, 육아하랴, 집 청소하랴. 이 모든 일을 다 해내다 보면 점점 남편과의 대화도 줄어든다. 관계가 나빠져서라기보단 정말 절대적인 시간이 없어서 말이다. 대화를 할라 하면 주로 미래에 대한 고민,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주된 주제이다. 모두 필요한 이야기지만 가끔은 연애 시절처럼 별거 없는 주제로 우리끼리만 재미있어하며 웃고 즐기던 때가 그립기도 하다.

오랜만에 글감사냥을 하다가 그런 순간을 다시 즐긴 마음이었다. 그가 제시한 글감을 선택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결국 이 상황이 한 편의 글을 만들어 주었다.

역시 마음이 움직여야, 뭐라도 쓸 수 있다.
남편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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