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분말상자] 버티고개

2017.3.12. 서사의 분말상자 프리퀄.

by 림팔라

예전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뜯어 먹다가 포장지에 적힌 '참치마요'라는 글씨를 보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청년의 글을 본 적이 있다.

참치마요라는 식품명을 '참지마요..'라는 메시지로 잘못 알아들었다는 부분이 자못 우습기도 하지만, 그 눈물을 흘리기까지 가슴 속에 내내 쌓아둔 앙금을 홀로 참아내고 있었을 고달픈 마음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동시에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그 외로움이 청년으로 하여금 위로를 갈망하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 결과가 이 우스꽝스러운 오독(誤讀)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오늘 아침에 나도 우연치 않게 비슷한 종류의 오독을 경험하였다. 정확히는 본 것이 아니라 들은 것이므로 오청(誤聽)이 맞겠다.


일단 이야기에 앞서 요즘 나는 학원 알바를 구하고 있다. 중학생 과외를 하나 하고 있긴 하지만, 그걸로는 아무래도 좀 빠듯해서. 과외가 생기면 좋겠지만 그리 쉽게 구해지지도 않아서, 돈은 벌어야 하는데 또 전공공부할 시간은 필요해서, 기타 등등의 이유로.


그런데 역시 돈을 버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과거에 다른 맥락에서 한 번 이 문장을 꺼낸 적이 있지만, 이 맥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학원알바 면접도 벌써 여러 번 보고, 참고서 교재 교정알바, 각종 멘토링, 눈에 보이는 대로 이것저것 다 지원해봤지만, 내 시간대나 기타 조건과 안 맞거나, 뽑는 쪽이 나를 원하지 않거나, 이 두가지 이유 중 하나로 어떤 돈벌이도 아직 구하지 못했다. (물론 그래도 지난 2년동안 깨알만큼 모아온 돈도 있고, 일이 없다고 해서 당장의 삶이 유지되기 어려운 그런 정도는 아니다! 다만 최소한 한 달에 쓰는 만큼은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노파심.)


오늘은 목동에 있는 어느 학습컨설팅 학원에서 QnA 선생님 자리를 뽑는다는 이유로 아침 10시 30분에 면접이 잡혔고, 나는 요근래 몇 달 간 일어나본 적이 없는 시간대인 일요일 아침 9시에 안암역으로 갔다. 그러나 당장 엊그제 봤던 화목 수학학원 조교 면접이 떨어져서(사실 스케줄이 안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때에는 그 원인을 몰랐다. 그래서 그냥 내가 맘에 안드나 싶었다.) 내겐 이미 자신감이 어느 정도 방전된 상태였고, 그냥 면접은 약속이니까 가서 얘기나 해봐야지 싶은 느낌이었다. 역시나 졸렸고, 공덕까지 가는 길에 꾸벅꾸벅 졸던 중, 내 귀에 어떤 소리가 박혔다.


"버티보게! 버티보게!"


내 귀에는 그게 '버텨보게!'라는 말의 방언처럼 들렸다.
아무리 지금 하는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없고, 당장 지금도 그렇게 희망적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한번 버텨보게!


물론, 실제로 내 귀에 들린 말은, 제목에 써놨듯 6호선 '버티고개'역을 알리는 안내멘트였다. '이번 역은 버티고개, 버티고개 역입니다'하는…


나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꽤나 많은 걸 버티려 했던 것 같다.
24년 만에 처음 시작하는 나 혼자만의 일상. 내가 쓰는 돈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많았고, 돈은 생각대로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결코 아니었고, 전공 수업들은 아직은 할 만하지만 당장 2주만 지나도 지금보다 몇 배는 힘들어질 것을 알기에 감당하기 버거워 보였고, 2년동안 자연스레 소원해진 인간관계는 그 흐려진 관계도 뿐 아니라 나의 새로운 관계맺음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자연스레 자신감은 떨어져 갔고, 그런 내 표정은 어떤 면접관이 보기에도 그리 매력적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리라. 동시에 새로운 사람을 만날 준비도, 원래 알던 사람에게 다시 다가갈 용기도 많이 더뎌졌다. 실제로 엊그제는 고려대역에서 집까지 가면서 (내 기준에서) 내가 아는 사람을 5명 정도 보았는데, 그 중 나와 인사를 나눈 사람은 2명 뿐이었다. 나머지 3명은 차마 먼저 인사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셋 다 후배였다.) 다채롭고 골치 아팠던 학교 생활은, 이제 깔끔하게 공부만 남았는데, 공부라는 건 정말이지, 잊고 살았지만 참으로 골치가 아픈 일이었다.


어쨌든 내가 이러한 고민을 품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버티고개 덕분이다. 나름대로 일단 이번 면접도, 그 가상의 격려 덕분이었는지, 그럭저럭 잘 이야기했던 것 같다. 물론 결과는 다음주 화요일이나 되어야 알 수 있다. 그래도 최소한 내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버텨보자는 의지를 조금 다졌기 때문에, 또 얼마 간은 이 복잡한 시장 속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내가 버티고개를 버텨보게로 들은 것은 정말로 완벽히 틀린 해석이었다. 이전에도 6호선을 타면서 버티고개라는 이름을 많이 들어보았고, 굳이 뜻을 찾아보진 않았지만 뭐 고개가 올라가기 힘드니까 잘 버티라고 버티고개겠지, 아니면 뭐 쏟아지는 산사태를 막고 버텨주는 고개라서 버티고개? 뭐 그런게 아닐까 싶었는데, 오늘 찾아본 결과 전혀 다른 뜻이었다.


버티고개는 길이 좁고 사람이 잘 지나지 않는 장소여서, 예전부터 도둑이 많이 출몰하던 고개였다고 한다.
순라꾼들이 야경을 돌면서 ‘번도!’라고 외치며 도둑을 쫓았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 · 번티고개라 하다가 변하여 '버티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즉, 도둑을 쫓는다는 말.


아마 우리 모두는, 우리 각각의 삶 어딘가에 도둑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돈을 막 쓴 기억도 없는데, 어느새 잔고는 밑바닥을 보이고. 공부를 그래도 나름 열심히 했던 것 같은데, 열심히 외웠던 개념들은 어느새 내 머리에서 사라져 있고. 그 외에도 내 키는? 마른 몸은? 열정과 희망은? 애정운은?
전부 누가 가져갔는지 도통 모를 일이다.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을 날이 올 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도둑들을 하나 하나 쫓으면서, 오늘 하루도 버텨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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