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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림팔라 Aug 28. 2022

미디엄 레어 라이프

생일 기념 짧은 글


"스테이크 굽기는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셰프 추천은 미디엄 레어입니다."

생일을 맞아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고기를 썰었다. 우리의 선택은 물론 미디엄 레어였고, 나는 스테이크를 시킬 때마다 '미디엄 레어'라는 이름이 참 영리하게 지어졌다는 생각을 한다.

단계를 5가지로 나누는 이름 다발들도 참 많다. 그 중에서 나한테 가장 익숙한 비슷한 명칭은 [Easy-Normal-Hard-Very Hard-Nightmare(Hell, Expert...)]다. 맞다, 게임 처음 시작할 때 난이도 고르는 그거다.
아니, 노말이 가운데로 와야 비슷한거 아니냐하고 지적하고 싶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내가 보기엔 미디엄보다 미디엄 레어가 훨씬 더 노말(보통)에 가깝다. 사람들은 대부분 겉바속촉을 선호하고, 그러한 측면에서 미디엄보다는 미디엄 레어가 훨씬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선택이다.미디엄은 생각보다 촉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말 굽기로 구워주세요'와 '미디엄 레어로 구워주세요' 사이에는 굉장히 커다란 심리적 간극이 있다.
결국 둘 다 적당히 부드럽게 구워달라는 소리임에도, 노말은 그냥 평범하게 시키는 느낌인 반면, 미디엄 레어는 뭔가 [레어-미디엄-웰던] 3분위로 나뉘어진 기존의 규격 체계에 귀속되지 않고 더욱 다층화된 층위를 탐색하고 고민하여 치열하게 자신의 최적의 취향을 찾아낸 느낌이다.
즉, '미디엄 레어'는 가장 평범한 선택을 하면서도 굉장히 커스터마이징된 주문을 하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마법의 언어인 것이다.

오늘은 부모님과 단골인 소고기 숯불갈비집에 갔다.핏기가 사라질 때마다 야무지게 집어먹으며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뜯고 있는 이 생갈비가 미디엄 레어임을 깨달았다.소고기 내부의 육즙을 의식하면서 먹으니 조금 더 맛있는 것도 같았다.

내 삶에도 조금 더 그럴 듯한 이름을 붙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고 주말에는 사람 만나고 쉬는 삶이라고 생각하면 너무나도 평범한 느낌이지만,아직 설익은 말투, 행동, 마음들이 점차 익어가는 삶의 경험치,  권태감 같은 것과 맞물려 만들어내는 가장 조화로운 흔들림을 맛보는 삶...뭐 그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조금 더 맛있어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대충 지금 즈음의 삶을 미디엄 레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 입맛상 딱히 별로 더 익혀먹고 싶진 않은데 불 조절을 잘 해가며 살아야겠구나 싶기도 하고.

* 평소 고깃집에서 뭐라도 좀 구워본답시고 집게를 잡으면 다른 사람이 서둘러 뺏어갈 정도로 고기 굽기에는 일가견이 없는 사람이 쓴 글이니, 요리에 대한 전문성과 정확성이 전혀 없는 점은 너른 양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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