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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 Feb 15. 2021

소울 (Soul, 2020)

꿈은 내게 떨어지는 단풍과도 같아서-

 꿈은 왜 ‘쫓는’ 것일까.


우리는 꿈을 좇아 사는 삶이라고 말한다. 아니, 쫓기다 라는 표현은 좋지 않은 표현이라고 익히 생각했는데 우리 모두가 그리 사랑하고 따르고자 하는 ‘꿈’을 쫓다니. 표현의 모순이 아닌가. 그렇지만 꿈을 좇는 것은 부단히, 성실하게, 행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꿈이 꿈 자체가 되기 위해서는 이미 자리 잡은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해야 하며 현실과의 조율은 필수과정이다. 꿈이 꿈이 될 수 있도록 우리는 부단히 나아가야 한다.
 나는 글과 영화가 좋았지만 사실 부단히 쫓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늘 삶에 있었고 나를 지지하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급히 쫓지 않아도 자연스레 늘 곁에 존재했다. 글을 쓰든 안 쓰든, 썼다가 지우든 브런치를 비롯한 어딘가에 업로드를 하든. 영화를 보다가 끄든 안 끄든, 영화 리뷰와 글 쓰기를 시작하든, 끝마치지 못하든. 늘 내 곁에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렇게는 안 되겠다는 조바심과 함께 어떤 것과 타협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결과물을 내야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나 자신을 속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위대한 결과물을 냈을까,

 단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늘 곁에 있는 것들인데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야 한다고 내 모든 시야를 가려 나와 목표. 단 두 가지만 내 삶 속에 놓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영화 <소울>은 우리 모두를 위한 영화이다. 누구든 꿈을 이루기 위해 달리는 사람들 말이다. 좌절을 겪었든 성공의 짜릿함을 맛보았든지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꿈은 내게 떨어지는 단풍과 같아서 내가 달려가면 바람에 날아가버리거나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바꾼다. 누구나 경험해봤을 것이다. 꽃잎이든, 심지어 옷가에 붙은 먼지이든 공중에 띄워져 바람을 타기 시작하면 오히려 손을 급히 가져다 대면 반대방향으로 도망가버리고 만다.


story

 영화 <소울>은 재즈 피아니스트 조 가드너가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가게 된 영혼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조 가드너는 중학교의 밴드부 선생님이다. 엉망진창 실력의 밴드부를 담당하고 있지만 그는 오로지 피아노의 선율을 사랑하는 그 마음 하나로 이 곳에 있는 것이다. 공연을 늘 갈망하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동경하던 재즈 보컬리스트의 밴드에 연주해볼 기회가 생겼고 그는 리허설 겸 오디션을 통해 공연에 서는 것이 확정된다. 그렇게 공연 날만 기다리던 조 가드너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사고로 그가 혼수상태가 된 것. 공연장이 아닌 영혼의 세계, 하필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길에 도착하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조는 이 길에서 빠져나와 멋대로 다른 곳으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그가 도착한 곳은 '유세미나'가 한창인 수많은 영혼들이 지구로 가기 전의 장소. 태어나기 전 영혼이 형성되는 곳이다. 몰래 이곳으로 숨은 조는 정체가 발칵될까 다른 사람의 이름을 훔치게 되면서 얼떨결에 구제불능 영혼 22의 멘토가 된다.



불행을 감수하겠는가?

                 우리는 꿈을 좇으면서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화는 그 반대로 이야기한다.


 꿈을 쫓아가던 그의 영혼은 혼수상태에 빠져 죽음의 길로 가는 곳에 서있게 되었다. (물론 육체의 사고로 인해 그가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그는 죽음에 이르는 길목에 서있게 된다.)
그토록 바라던 꿈을 향해 가면서 그는 행복한 미래만을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피아노 선율에 많은 사람들이 손뼉 쳐주고 이를 감상하는 모습. 하지만 어째서 영화는 그는 더 불행해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가까스로 조와 22는 함께 지구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영혼이 바뀌면서 22호는 조의 몸으로 지내게 되는데 걷는 법도 모르던 22는 처음 먹어보는 피자의 맛, 지하철역의 노랫소리, 그리고 조 가드너가 가르치고 있는 밴드부 아이의 연주하는 모습.

불어오는 바람과 흩날리는 단풍잎들. 그 속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목소리들. 이것을 듣고 22는 처음으로 지구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22의 지구 통행권

                   22호는 어떤 목적과 목표가 아닌 자기 자신이 행복한 순간, 그것을 꿈으로 삼았다.


 비록 조 가드너의 몸이었지만 자신의 얼굴을 감싸는 온기와 그 속에서 떨어지는 단풍잎. 그리고 거리의 사람들의 웃음소리 속에서 22는 지구 통행권을 만드는 마지막 배지가 생겼다. 꿈의 목표는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꿈을 통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로는 부족하다는 조의 말에 22는 곧장 나락으로 떨어진다. 

 22가 조 가드너의 말에 상처를 받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하는 말은 온통 자책뿐이다. 자기 자신을 몰아세우며 목표와 목적을 향해 달리라고 채찍질하는 것. 아마 조 가드너의 모습이었지 않았을까. 


 자신의 꿈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엄마의 눈초리와 꿈과는 멀어져 가는 것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는 아마 숱한 밤을 자책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그렇게 오히려 그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조 가드너는 자신 스스로를 더 믿어주지 못했던 것일까,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꿈을 좇기만 했던 그에게 생긴 불행이지만, 우리는 이런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가? 꿈을 이룬다는 것에 대한 개념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번 정립할 필요가 있다.



 <소울>은 삶의 목적, 꿈의 목적을 없애라고 조장하지 않는다. 다만 현대인들이 가진 짐을 같이 지고 있기에 알 수 있는 그 무게의 정도를 덜어줄 방법을 제안하는 것뿐이다. 현시대에 ‘같이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공감과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없던 것을 새롭게 만들라는 것도 아닌 우리가 가진 것들을 그저 보여주기만 한다. 늘 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꿈으로 사는 것이다. 꿈을 좇기만 했던 우리에게, 좇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우리에게 꿈으로 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소울>은 OTT대국과 영상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 시네마의 의미를 굳건히 한번 더 지킨다. 관람객들이 소비하는 시간과 돈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하는 것이다. 경험으로써의 영화란 기계적인 장치에만 있지 않다고 한번 더 이야기한다. 우리가 잊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보여주는 픽사의 전략은 살아가는 우리에게 공감과 위로와 응원을 건넨다.



*사진 출처: IMDB <Soul(2021) > Photo Gallery

                네이버 <소울>(2021) 포토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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