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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래 Jan 23. 2023

소비자의 수요는 기획되는 것

2023. 1. 16 ~ 1. 22) 고객은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동네에 있는 큰 공터에 공공기관이 하나 들어선다고 치자. 지방자치단체는 이 기관이 대략 문화예술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방향만 가지고 있다. 도서관? 미술관? 복합문화공간? 스포츠센터? 그 중 무엇이라도 사실 상관 없고, 그런데 결국엔 다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자체에서 이런 사업을 추진하기 전엔 <<입찰 - 기본계획(마스터플랜) - 입찰 - 실행계획 - 입찰 - 설계 - 입찰 - 시공>의 과정을 거친다.  때때로 이 프로세스에서 계획은 합쳐지기도 하고, 설계와 시공이 합쳐지기도 한다. 


이 마스터플랜 수립 용역을 받은 용역사는 여러가지 리서치를 통해, 이곳에 알맞은 계획을 짜던가, 지자체장이 이곳에 만들고 싶어하는 것을 해도 타당하다는 근거를 만들어낸다. 어떤 상황이든 지자체장은 '주민 수요 조사'를 하는 것을 선호한다. 많은 경우 이미 결론은 내려져 있고, 그 결론은 지자체장이 내릴 거지만, 그 과정에서 '주민 수요'라는 것이 요구된다. 지자체장도 자기가 결론 내린 것을 들키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사용하는 사람은 주민들이 될 것인데, 도대체 결정의 권한은 왜 주민에게 있지 않을까? 전국의 많은 공공기관들이 수십년동안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고, 방치되었다. 예전에는 행정 절차 상 건물이 먼저 생기고 던져지면, 그제서야 운영계획이 작성되는 식으로 아예 쓰임조차 사후에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국에 방치되어 사람 찾기도 힘든 문화예술공간이 많은 것엔 이런 이유가 한 몫 한다. 말 그대로 수요없는 공급. 나는 전에 이런 흐름을 뒤틀고, 건물을 만들기 전에 쓰임을 먼저 디자인하여 제안하고 그걸 설계와 시공으로 이어가는 회사에서 일을 했다. 물론 내가 담당하는 것은 설계 이전까지의 작업이었다. 우리는 '결정'의 순간까지 기획해서 지자체장의 결정을 바꾸는 흐름을 만드는 일을 계획단계 최종목표로 삼았었다. 


대학에서 문화콘텐츠를 전공하고, 다양성과 미시적 관점으로 사람을 통해 리서치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생각했던 내게, 이 회사에서의 프로젝트들은 모두 너무나 하고 싶고 즐거운 일들이었다. 프로젝트에 앞서 대상지 현황을 조사할 때, 문헌조사외에 현장조사가 굉장히 중요했다. 현장조사에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투입되었다. 다양한 층위의 지역주민이 만나고, 자신들의 욕구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를 수도 없이 가지고, 그 답을 분석하고 정리해서 유효한 데이터로 만들어간다. 


하지만 내가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 내가 지역 주민들의 의견 앞에 한참이나 기획자로서 내 자아를 낮추고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새로운 태도를 요구받았다 "기획의 중심은 여러가지를 고려하고 전문적인 기준을 설정한 기획자가 가져야지, 절대로 주민에게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이 말은 내게 조금 충격적이었는데, 사회초년생이었던 나에게 전문가로서의 자아와 기획자로서의 주도권은 애초에 존재한다고 느껴본 적도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고(그래서 혼난 거겠지만), 내게 주민의 의견이란 신성불가침 영역처럼 느껴질 정도로 너무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알게되었다. 왜 내가 중심을 가져야 하는지. 공공공간은 대상으로 하는 모든 사용자에게 충분히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공익적 공간, 공공성을 만들어가야하는 공간인데 반해 주민 한명 한명은 스스로를 시민으로서 혹은 공인으로서 정체화하고 공익을 위해 수요조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물며 주민 한명에게는 시민 한명으로서 내가 무엇을 지역사회에 요구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의 어떤 결핍이 '공공'과 '공동체'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지도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없던 선택지였던 것이다. 물론 그동안 그런걸 생각해보고 의견을 만들 기회조차 주어져본 적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이다. 


사업을 시작하고 수없이 많은 멘토들에게 '고객이 원하는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고객의 말을 듣고 기민하게 움직이고, 고객의 수요를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그래서 고객을 관찰할 수 없으면 당장 사업을 접어야 한다는 속도높인 발언까지. 모든 비지니스의 중심에 고객이 놓여져있는 것이 이 세계의 신성불가침 영역 같았다. 물론 그 말도 어느정도 맞을 것이다. 소비자로서의 나를 생각해보면 아주 작은 것에도 나의 결정이 달라지곤 하니까. 


하지만 정말 이 전제가 100%의 흠잡을 곳 없는 사실이라면, 사실상 이 모든 프로덕트에 전문적 식견을 가진 기획의 중심이란 없는 것과도 같다. 그리고 중심이 없는 프로덕트가 제대로 제 기능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프로덕트들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비용을 쏟아붓겠다는 어리석은 소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눈 앞의 수요에 급급하여 고객을 쫓아가다보면 결국엔 길을 잃게된다. 왜냐면 소비자도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어디인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 그건 바로 소비자의 수요를 기획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대기업과 손을 잡은 언론일 수도 있고, 자신의 영향력을 가지고 메세지를 만들어내는 1인 미디어일 수도 있다. 우리는 1970년대 이후 수요와 공급이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저절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과잉생산으로 인한 가격하락의 상황과 전반적인 소비재 품질 상승에서 차별화를 꿰어야하는 기업들의 필요에 따라 조절되고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떤 삶에 대한 욕망을 만드는 미디어, 그 욕망을 좇는 소비자, 그 소비자의 마음을 좇는 기업.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위치하지 않으려면, 절대로 눈앞의 결과와 반응에 휘둘려서는 안된다. 좀 더 높은 앵글로 나의 고객의 위치한 세계, 받고 있는 영향, 행동의 원인을 분석해야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규모가 어떠하든 유효한 고객들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미디어가 되는 것. 메세지에 공명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 수없이 많은 채널과 미디어들이 판을 치지만 그 모든 채널이 다 한 방향의 삶을 당장 추구하지 않으면 인생이 파멸할 것처럼, 나 혼자 도태될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다른 메세지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공명하는 사람을 찾는 것이 어쩌면 한 방향의 메세지에 꽃혀 수없이 흔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좇는 것보다 가장 빠르고 간단한 선택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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