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찮은 위대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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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래

국립민속박물관에 다녀왔다. 입장료가 무료라서 가난하던 시절 국립박물관들을 자주 들렀었는데, 판에 박힌 듯한 박물관의 이미지라 내용을 깊게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은 빌라선샤인 프로그램 <전시독후감> 을 통해서 다른뉴먼들과 함께 전시 뜯어보기를 했다. 오늘 함께 본 전시관은 <한국인의 일생>이라는 전시였다. 전시를 다 보고 나서 우리는 정확하게 <조선 후기 사대부 집안에 태어난 조선남의 일생> 이라고 전시 제목을 고쳐야된다고 이야기하며 웃었다. 명망있는 사대부가문을 만들기 위해 아이를 낳고, 키우고, 뒷바라지 했던 수많은 삶은 전시에서 사라져있었다. 이 전시관은 기획된지 좀 시간이 지났다고 한다. 막 화가 나던 예전과 달리, 머지않아 바뀌겠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엔 또 다른 뉴먼님의 은혜를 입고 연극 <창문으로 도망친 100세 노인>을 봤다. 소설로도 너무 재밌게 읽고, 영화도 재미있게 봤는데 연극까지 정말 재미있었다. 마지막 날이라 부랴부랴 시간을 쪼개어 갔는데, 다녀와서 누군가에게 추천해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또 볼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폭탄제조법을 아는 영특한 꼬마였기 때문에 겪게된 파란만장한 100년의 역사를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어. 어쩔 수 없으면 아무렴 또 어때?’의 태도로 서술하는 이 연극의 연출은 정말 독특했다. 가장 독특했던 것은 여자 역을 여자 배우가, 남자 역을 남자 배우가 하지 않는 거였다. 남자 역할을 여자가 하기도 하고 남자가 하기도 하고, 여자 역할을 여자가 하기도, 남자가 하기도 하고, 눈 앞에서 정체성과 역할이 휙휙 바뀌기도 하는게 정말 독특했다. 처음 무대가 시작되고 ‘성별 따윈 아무렴 어때, 신경쓰지 말아요!’ 하고 배우들이 가이드를 주는데도 뭔 말인지 이해를 못했는데, 극이 진행되자마자 성별 따위 정말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이 놀라운 경험이었다.


어쩌다 보니 성별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오늘 전시와 연극을 보면서 생각했던 건 바로 ‘기록’ 이었다. 기록되는 삶과 기록되지 않는 삶. 민속박물관에서는 행간으로 사라져 나타나지 않은 기록들을 상상했다. 연극에서는 기록된 역사들 사이를 촘촘히 매꿨던 평범한 삶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여성들과 여성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를 기록하는 사업체를 만드는 작은 꿈이 있다. 당장은 눈앞의 현실 때문에 치워버린 꿈이지만, 이렇게 기록에 대한 생각이 수시로 떠오를 때면 당장 해야할 일처럼 느껴져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그런 꿈.


첫 직장생활을 한 중간지원조직에서 했을 때, 지역의 젊은 주부들과 함께 ‘나를 찾는 글쓰기 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적이 있다. 도대체 무슨 글을 써야할지 모르겠다는 그녀들과 첫번째 시간에 <아버지의 이메일>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어느날 안쓰는 메일함을 열어보았더니, 정보화 교육에서 이메일보내기를 배운 아버지가 죽기전 수십통의 이메일을 보내어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것을 보고 영화감독인 딸이 다큐로 만든 영화다. 그 영화는 한국사의 굵직한 기록들이 한 개인과 그 개인의 가족들의 삶을 어떻게 송두리째 바꿔놓았는지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 영화를 보고서 주부들은 첫번째 글감을 ‘아버지’로 결정했고, 그 다음은 어머니, 그 다음은 첫사랑, 그 다음은 어린 나에게 보내는 편지로 정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글로 이어갔다. 매 시간마다 눈물을 흘리는 간증타임이 있었음은 당연하다. 정말 그분들이 대단했던 건, 자신의 개별적인 삶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보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끝까지 페미니즘 이야기를 같이 하진 못했던 시절이지만) 나와 사회를 연결시키는 일이, 어머니들에게 이렇게 쉬웠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시를 같이 본 뉴먼들에게는 식사를 하면서, 과거에 진행했던 <안동 종가음식 구술사채록> 때 들었던 종부님들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60년대에 이미 농구선수였지만 결혼을 하며 선수생활을 접은 어떤 종부님의 이야기, 종부님이지만 남편의 사랑이 너무 극진해(???;;;)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을 차려본적이 없었던 어떤 종부님의 이야기, 재산이라고 남은건 달랑 한칸짜리 한옥뿐이지만, 80살이 넘어서도 1년에 80개가 넘는 제사를 지내야 하는 어떤 종부님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야기를 들은 분들은, 아 이런 이야기 진짜 모아서 빨리 기록해놔야한다. 이제 곧 돌아가실텐데, 그러면 사라질 이야기 아니냐! 하며 흥미로워하셨고, 나는 ‘그러게 말입니다 ㅠㅠ’ 하며 물이나 야금야금 먹었다. 그러게. 시간이 많지 않은데.


최근에 읽은 책에서는 저자가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내는 일에 있어서 구술문화를 되살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세실 엔드류스) 구비문학의 시대를 지나 문자와 인쇄술이 생겨나고, 그게 저명한 사람들에게 발언의 권리를 독점하게 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구술을 기록할 가치가 없는 것이 되었는데 그 세월이 만들어놓은 역사라는 것을, 기록이라는 것을 보면 모두에게 발언, 기록, 공개(퍼블리싱)의 기회가 원한다면 주어진다는 점에서 지금 우리가 용기를 내고 말하고, 기록하고, 공유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 마음이 급해진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기에 얼마나 좋은 시기인지도.


한편으로는 넘쳐나는 텍스트와 포스팅들에 정신을 못차리면서도, 한쪽으로는 의미있는 기록을 미친듯이 생산하고 만들고 수집하고 싶은 딜레마가 괴롭다. 여튼 정치사 - 경제사 - 사회사 - 문화사 순으로 배우는 공교육 역사 교과서 목차라도 문화사 - 사회사 - 경제사 - 정치사로 바꿀 수 있다면 각자의 하찮고 위대한 이야기들을 발견하는 날들이 더 빨리 더 자주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는 마지막에 술집에서 본 티비에서 계속 설민석이 나와서 마무리가 이런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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