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는 평소에도 많이 쓰니까 1일 1글쓰기에서는 일기를 남기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을 기록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아침을 떠올려본다. 오늘은 제안PT 첫 데뷔일이었다. 제안서를 쓰더라도 늘 대표님이 발표를 하시곤 했었는데 이번 피티를 해보라는 말을 듣고는 기쁘면서도 마음이 복잡했다. 대표님은 "정 안되면 내가 해도 되는데,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라고 말씀하셨다. 정 안된다니, 그 말은 뭐야. 사표내란말이야? 하는 생각과 함께 해볼게요. 하고 이야기를 했다. 그게 어제다. 지난 주말 왠지 이렇게 나오실 것 같아서 일요일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경건한 마음으로 스크립트를 써내려갔다. 피티가 결정된 이후 하루종일 스크립트를 읽어내려갔지만 자정을 넘긴 시간에도 혀는 꼬이고 문장은 꼬였다.
지쳐 잠들었다 번쩍 눈을 떠보니 새벽 5시 30분. '일어나, 차 마실 시간이야' 하고 알람이 울린다. 차 마실 시간이라고 하면 내가 좀 잘 일어날까 싶어서 맞춰둔 알람인데 사실 그 시간에 일어나 차 마시는 일은 이렇게 피티데뷔일 정도 되어야 가능하다. 무슨 차를 마실까 고민하다가, 어제 선물받은 포트넘 앤 메이슨의 QUEEN ANNE 을 골랐다. 차 이름에 들어가는 '퀸'이라는 단어가 나한테 카리스마라던지, 자신감 같은 것들을 불어넣어주길 기대하면서. 하지만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가시질 않아, 카카오톡에 나와의 대화 창을 켜놓고 이야기를 나눈다.
"도망치고 싶어"
"어짜피 못도망쳐"
"세상 멸망 해버리면 좋겠어"
"그럴 시간이 피티 준비를 해!!"
내 안의 소민이와 소민이가 서로를 지겨워하며 싸우는 동안 정신을 차리고, 문장이 꼬이던 페이지들의 스크립트를 다시 고쳐나간다. 오늘 오전엔 온 회사 식구들이 다 모여서 내 피티 리허설을 하겠다고 했는데, 사실 피티보다 그게 더 부담스럽다. 초롱초롱한 팀원들이 바라보는 앞에 피티라니...
녹음도 하고, 동영상도 찍어보고, 피티를 외운채로 거울을 보면서도 해보고, 샤워를 하면서도 허공에 대고 마구 떠든다. 50장의 피티를 거진 외운 듯 하다. 아침에 일찍 나가 세탁소를 들려 옷을 다리고 어쩌구 하는 계획은 이미 애초에 사라져버렸다. 오랫만에하는 화장이 잘 먹으라고 각질도 날려버리고, 약국에 들러 우황청심환을 한병 샀다. 두병달라고 했는데 약국 할아버지가 한병으로도 충분하다고 더 팔지 않으셨다. 왜요. 왜! 돈 낸다는데 왜 팔질 않으세요 흑흑
그 뒤로는 시간이 후루룩 후루룩 지나갔다. 회사에 가서 화장을 좀 하고 (피티를 위해 화장하는 것이니 업무라 치기로) 리허설 준비를 하고 리허설을 하고 자기 일 아니라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훈수놓는 사람들을 ^^ 웃으며 바라보고, 피티 앞두고 잘먹으라고 7명 식사를 14인분정도 시켜주신 대표님 앞에서 엄청 잘 먹는 척을 하고, 전 대표님까지 오셔서 잘 하고 오라고, 두려움은 스스로 떨쳐내는 수밖에 없고 그건 시간이 필요한 거니 가벼운 마음으로 가라고 이야기해주셨다. 엄마 아빠가 수능보러가기 전에 응원해주는 느낌이었다. 청심환을 마지막으로 먹은 날도 그날이었다.
막상 피티를 하니, 생각보다도 별것 아니었다. 이제까지 내가 따라갔던 피티들이 너무 빡센 사업들이었던 건지, 피티하는 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마주쳐주시던 심사위원들도 고마웠고, 질의도 온화한 분위기에서 계속 되었다. 심사위원들은 무슨 생각으로 심사하러 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오늘도 해버렸다. 내가 언젠가 세월이 흘러 누군가를 심사하게 된다면 절대로 저런 질문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래도 함께 피티에 들어갔던 대표님과 다른 팀장님이 리허설때보다 훨씬 잘했다고 해주셔서 에잇 몰라. 주사위는 내 손을 떠나버렸다!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대표님이 바뀌고 나서 우리 회사는 휴무가 정말 많아졌다. 웬만하면 쉰다. 오늘도 피티 끝나고 시청에서 바로 퇴근한 직원들이 있었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막내 둘도 바로 퇴근 시켰다. 그리고 나랑 대표님도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제안서 제출, 제출직후 휴가, 휴가 직후 피티를 겪으면서 한번도 집청소를 하지 않아서 집이 난리다. 이 모든 것을 가장 괴로워하고 있을 고양이들을 위해 화장실 대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분리수거 날이라 쓰레기를 내놓았다.
침대에 누워서 맘 편하게 게임하고 있는데 남자친구가 퇴근하며 연락한다. 입춘이고, 첫눈이 오고, 피티 데뷔일인데 파티를 해야하지 않겠냐고. 제일 좋아하는 술집인 비스트로 카덴에 가서 처음으로 네츄럴와인을 시켰다. 한입 마시는 순간 이제까지 써내려온 오늘 하루가 휘리릭 지나갔다. 피티가 끝나기 직전까지 1분 1초가 너무 괴로웠는데, 와인 한잔에 모두 기억할만한 일이 되어버렸다. 피티는 해보니 별 것 아니고, 주사위는 내 손을 떠났고, 오늘은 입춘이고, 첫눈이 왔고, 내 데뷔일이다. 대표님은 안되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좋은 소식 있었으면 좋겠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