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를 통해 부재를, 세상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보다
초등학생 시절, 집 앞 골목에는 조금 모자라 보이는 부랑인 아저씨가 항상 앉아 있었다. 엄마는 아저씨가 거기에 앉아 있는 걸 싫어했다. 나에게 해코지를 할까 싶어서다. 엄마의 우려와 달리 그가 내게 위해를 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뜻 모를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도 그냥 따라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불현듯 사라졌다. ‘그가 항상 거기에 있을 것’이라는 믿음, 그의 존재로부터 받은 작은 위로도 사라졌다. 골목은 텅 빈 공간이 됐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늦은 오후, 가족보다 날 먼저 반기며 웃었던 미지의 존재. 그때 그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가끔 그 아저씨가 생각난다.
영화도 비슷하다. 영화 속 주인공은 항상 거기에, 그대로 있다. 엘리오는 벽난로 앞에서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청년의 모습으로 항상 거기에 있다(<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오타루 운하 다리 위에서 윤희와 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계속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윤희에게>). 고대하던 첫 사랑을 만난 뒤, 차오르는 행복을 주체할 수 없었던 우즈키의 황홀한 표정 역시 항상 거기에 있다(<4월 이야기>). 영화학자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영화는 우리를 배우의 현존(現存) 속으로 이끈다. 스크린 속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곁으로. 성장한 인물이 아닌, 늘 성장하고 있는 인물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인간은 지속해서 움직이는 것들의 발현 속에 있다. 일상을 둘러싼 작은 사건들의 반복. 반복 속에서 생성하는 작은 차이. 그리고 변화. 가령 이런 것이다. 퇴근 후 항상 가는 식당에는 나만의 자리가 있는데, 거기에 누군가 앉아 있다. 그로 인해 나는 단 한 번도 앉아본 적 없는 자리로 간다. 그 순간 나는 다른 위치와 각도, 움직임으로 식당을 새롭게 발견한다. 늘 먹던 음식의 맛도 살짝 다른 것 같다. ‘거기에 그것이 있었다’에서 ‘거기에 그것도 있었다’로 관념이 바뀐다. 무언가 확실히 변했지만, 뭐가 변한건지 설명할 수 없다. 변함없는 일상이라는 말은 그래서 틀렸다. 세계를 부동(不動)의 공간으로 기억하는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다.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는 일상을 다른 일상으로 만드는 작은 균열과 파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카메라는 주인공 히라야마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을 천천히 따라간다. 매일 아침, 히라야마를 깨우는 건 동네 할머니의 비질 소리다. 비질 소리는 항상 그 시간에 자명종처럼 울려 퍼진다. 비질 소리가 없다는 것은 할머니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할머니가 존재하지 않는 골목은 더 이상 예전의 그 골목이 아니다. 물론 영화는 할머니의 부재를 다루지 않는다. 요컨대 이 영화는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비추면서 오히려 그것들의 부재를 가시화한다. 그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인물의 시점 숏
잠에서 깬 히라야마는 양치를 하고, 수염을 다듬으며, 세수를 한다. 화분에 물을 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공용 화장실 청소부로 일하는 그는 작업복을 입고 열쇠를 챙겨 밖으로 나간다. 그는 밖으로 나올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옅은 미소를 짓는다. 이후 그는 집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먹는다. 차에 탄 그는 달리는 도로 위의 풍경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히라야마의 시점 숏으로 그가 본 풍경을 나열한다. 이를 테면 도시의 랜드 마크인 ‘스카이 트리’, 인력거를 타고 있는 관광객들, 등교하는 학생들, 도로 위의 표지판처럼 별 의미 없는 이미지를 시점 숏으로 굳이 포착한다.
이 같은 이미지들은 오래 전 벤야민이 주창한 ‘파노라마 이미지들’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명멸의 이미지. 사유의 시간이 소거된 이미지는 우리에게 유의미한 자극을 선사하지 않는다. 정신과 육체에 각인되지 않는 것이다.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즉각적인 소멸성이 히라야마의 시점 숏에 있다. 동시에 히라야마의 시점 숏에는 늘 거기에 있는 것들을 새롭게 인식하는 영원성도 있다. 소멸성과 영원성이 교차하고 충돌한다. 늘 가는 일터가 그렇고, 점심시간 공원의 풍경이 그러하며, 퇴근 후 찾는 식당의 모습이 그렇다. 히라야마의 시점 숏에서 그것들은 매일 소멸하면서 다시 태어난다.
주지하다시피 이 영화에는 인물들의 시점 숏이 많다. 카메라의 전지적 시점뿐만 아니라 인물들이 직접 바라본 세상의 이미지도 많다는 얘기다. 전자가 ‘넌 이 장면을 봐야 해’라면, 후자는 ‘난 이 장면을 보고 있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상 역시 무의미한 시점 숏들의 연속이다. <퍼펙트 데이즈>는 거기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들을 새삼스럽게 포착함으로써 전혀 다른 무엇으로 현존하게 한다. 당연하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지나치는 것들, 설령 보았다고 해도 나중에 전혀 떠올릴 수 없는 것들에 구태여 시선을 주면서 색다른 부피와 질감을 더한다.
청소하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히라야마는 잠깐 밖으로 나가 하늘을 쳐다본다. 청명한 하늘 아래 나뭇잎이 걸려 있다. 바람이 불면서 나뭇잎이 흔들린다. 하늘에 걸린 채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히라야마는 옅은 미소를 짓는다. 그때 화장실에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평생 볼 수 없었던 풍경에 감동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웃는다. 그 나뭇잎의 흔들림은 그때 거기에만 존재했던 고유의 운동성이다. 생전 다시 볼 수 없는 몸짓이다. 이처럼 영화는 히라야마가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 출퇴근길에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그의 시점 숏으로 기어이 나열한다. 마침 거기에 있었던 것들의 시간을 포획하는 것이다.
히라야마의 취미는 필름 카메라로 사진 찍기다. 그는 점심시간 공원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하늘을 본다. 울창한 나무가 햇빛에 의해 빛나고 있다. 이 장면이 히라야마의 시점 숏으로 한 차례 나열된다. 다음 장면에서 그는 카메라를 꺼내 그 풍경을 찍는다. 이때의 장면은 영화의 카메라가 아닌 히라야마의 카메라 시점이다. 그가 셔터를 누르자 화면은 일순간 정지되며 흑백으로 변한다. 이 같은 몽타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화 이미지에는 피사체의 부단한 운동성이 있으며, 시간이 흘러간다는 감각이 있다. 사진 이미지는 그 모든 것을 포획한 일순간의 단면만 존재한다. 전자가 세계라면 후자는 세계에 관한 우리의 기억이다.
<퍼펙트 데이즈>에서 우리는 공간을 입은 이미지가 아닌 시간을 입은 이미지를 발견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세계를 공간이 아닌 시간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전혀 다른 무엇으로 기억(혹은 감각)된다. 가령 히라야마가 날마다 바라보는 스카이 트리는 도심 속 가장 높은 건물로서의 풍경이 아니다. 어제와 달라진 내 마음의 풍경이다. 스카이 트리를 통해 나를 보는 것이다. 학창 시절 들었던 노래가 평생 기억에 남는 이유는 우리가 노래를 공간이 아닌 시간을 통해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곳이 아닌 그 시절 들었던 노래. 이 영화의 카메라는 노래를 듣는 것처럼 공간이 아닌 시간 속에 있는 히라야마를 포착한다.
영화의 시점 숏
“뭘 그렇게까지 하세요. 어차피 더러워지는데”라는 동료의 말처럼, 히라야마는 지나칠 만큼 정성스럽게 화장실을 청소한다. 청소한다기보다 가꾼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다. 그는 두루마리 휴지를 다시 채우면서 끝 부분을 호텔 화장실처럼 V자 형태로 접는다. 화장실을 가꾸듯 그는 자신의 일상을 충만하게 가꾼다. 히라야마는 독서를 좋아하고, 화분을 돌보며, 팝을 즐겨 듣는다. 앞선 언급처럼 카메라로 하늘과 나무를 찍는 취미도 있다. 영화는 히라야마의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그가 어째서 청소부 일을 하게 됐는지 등 그의 개인사에 관심이 없다. 다만 그의 현재, 일상을 가꾸는 그의 모습에 집중할 뿐이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소재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유대인 학살 장면을 보여주지 않고, 사연 많은 한 남자의 평범한 일상을 다룬 <퍼펙트 데이즈>는 주인공의 과거를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는 아우슈비츠 담장 너머 저택에 사는 독일군 가족의 안온한 일상이 있고, <퍼펙트 데이즈>에는 비밀스러운 과거를 가진 남자의 소소한 현재가 있다. 전자는 역사의 비극을, 후자는 남자의 과거를 괄호로 묶고 관객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습니까?”라고. 우리는 정말 무엇을 보았을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게 있다. 바로 의미심장한 필로우 숏과 꿈 장면이다.
필로우 숏은 원래 의미가 없다. 장면과 장면을 잇는 기능적인 숏에 불과하다. 가령 주인공의 집 내부를 보여주기 전에 집이나 동네의 전경을 포착하는 이미지가 필로우 숏이다. 일종의 인서트 장면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필로우 숏은 꾸준하게 반복하면서, 반복하는 가운데 미묘한 차이를 생성하면서 모종의 의미를 획득한다. 히라야마의 아침을 깨우는 동네 할머니의 비질 장면이 대표적이다. 주지하다시피 비질 장면은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카메라는 그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고, 소리만 들려줄 때도 있다. 후자가 바로 비(非)가시화의 가시화다. 가시화하지 않은 텅 빈 숏이 히라야마의 아침을 깨운다.
“엄마가 그러는데, 삼촌은 우리랑 다른 세상에 산대”라는 조카의 말에 히라야마는 “알고 보면 이 세상은 수많은 세상으로 이뤄져 있다”라고 답한다. 이 영화를 구성하는 수많은 필로우 숏은 장면과 장면을 잇는 기능적 차원의 이미지가 아니라 인물과 관객을, 세상과 또 다른 세상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존재론적 차원의 이미지다. 영화가 선사하는 텅 빈 무인의 숏을 마주한 관객은 ‘거기에 내가 있다’라는 상태를 감각한다. 숏의 현존 속으로 이끌리는 것이다. “나는? 난 어느 쪽 세상에 사는데?”라는 조카의 말에 대한 대답이 바로 <퍼펙트 데이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필로우 숏, 즉 영화의 시점 숏이다.
다음은 히라야마의 꿈 장면이다.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그의 꿈에는 명확하게 존재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같은 불가해한 이미지들은 영화가 비밀스럽게 봉인하고 있는 히라야마의 과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가출한 딸을 찾으러온 누나는 히라야마에게 “아버지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지만, 요양원에 한 번 찾아가는 게 어때?”라고 묻는다. 이어 “예전처럼 그러진 않으실 거야”라고 덧붙인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누나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가 지금 청소부로 일하며 가족과 단절하고 지내는 이유가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상처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 영화는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길과 사물, 사람들 사이에서
영화가 시작하고 10분 넘게 침묵하던 히라야마가 처음 입을 여는 순간은 공원 화장실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혼자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날 때다. 그는 “왜 그러니? 엄마랑 왔니?”라고 말하며 아이의 손을 잡는다. 곧 아이는 엄마를 만난다. 그날 꿈에는 히라야마가 아이의 손을 맞잡은 장면이 클로즈업 숏으로 등장한다. 차이를 두고 반복하자면, 히라야마가 아이의 손을 잡았던 그 순간이 실재하는 세계였다면, 꿈에 등장한 이미지는 히라야마가 실재하는 세계를 감각하고 기억하는 방식이다. 히라야마는 아마도 생전 그 아이를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와 맞잡은 손의 감각과 기억은 영원히 지속할 것이다.
히라야마가 스카이 트리를 보지 않는 날엔 영화가 대신 그것을 본다. 영화의 시점 숏 안에서 히라야마는 스카이 트리를 배경으로 자전거나 자동차를 탄다. 관객은 히라야마가 아닌 영화의 시점 숏을 통해 스카이 트리를 본다. 숏으로 이끌린 관객은 정말 스카이 트리를 보았을까.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듯 집을 나서는 히라야마의 얼굴에서, 스카이 트리에서 우리가 진실로 마주하는 것은 각자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타인을 통해 자신을, 존재를 통해 부재를, 세상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환기한다. 그렇게 우리는 길 위에서, 시내에서, 군중의 한가운데에서, 사물들 사이의 사물, 사람들 사이의 사람으로 자신을 발견한다. 사르트르의 말이다.
참고문헌
김호영 『영화이미지학』
이솔 『이미지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