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FA 장편과정의 영화적 흐름
대학원 시절 우연히 한국영화아카데미(이하 KAFA)에 관한 글을 접하게 됐다. 정성일 평론가가 영화주간지 씨네21에 쓴 「영화아카데미 20년 - 영화광 정성일이 ‘질투심으로’ 날리는 충고」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그는 이 글에서 KAFA에 다니는 친구들을 부러운 심정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을 술회했다. 소년가장이었던 그는 대학 졸업 후 KAFA에 다니고 싶었지만,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영화 글쓰기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KAFA에 다니고 있던 친구들을 질투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KAFA에서 영화를 배우고, 만든다는 일이 어떤 것일까 상상했다.
불안한 청춘의 욕망을 다채롭게 포착하다
그 후로 꾸준히 KAFA 출신 감독들의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전체 교육과정 중에서 장편과정(KAFA 정규과정 졸업생 외에도 장편영화 제작 연출 경험이 없는 일반 영화인을 대상으로 장편영화를 완성하게 하는 심화 프로그램. 2007년부터 시작됐다)이 특히 흥미로웠는데, 주목했던 첫 영화는 윤성현의 <파수꾼>(2010, 장편과정 3기)이었다. <파수꾼>은 남학생들의 미묘한 관계성을 탐구한 영화다. 영화는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로 가득하다. 뚜렷한 원인은 부재하고 모호한 결과의 나열만 있다. 기태(이제훈)는 왜 그토록 희준(박정민)을 미워했을까. 반대로 희준은 왜 그토록 기태를 밀어냈을까. 두 사람은 시종일관 무의미의 광란을 벌인다. 때리고, 헐뜯고, 욕하며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각종 커뮤니티에는 불투명한 <파수꾼>의 감정을 퀴어적으로 분석한 글이 많았다. 기태가 희준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설명할 수 없는 행동들을 퀴어링(queering)한 것이다. <파수꾼>의 비평적 성취는 바로 이 같은 지점에 있다. 남학생들의 관계를 이성애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퀴어적으로 독해할 수 있는 영화적 공간을 열어놓았다. 이 같은 포인트는 윤성현의 첫 단편 <아이들>에서도 발견된다. <아이들>의 태준(이민웅)과 진욱(구교환) 또한 통상적인 남학생들의 관계와는 달리 미묘한 감정을 주고받는다.
두 영화는 학창 시절 동성친구에게 느꼈던 복잡다단한 감정을 ‘우정’이라는 단어로 눙치거나 포획하지 않는다. 관객의 상황이나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영화는 사유의 폭을 확장한다. 좋은 영화란 바로 그런 것이다. 또한, <파수꾼>과 <아이들>의 성취는 비평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두 영화는 이제훈, 박정민, 구교환 등 현재 한국영화를 가장 중심에서 이끌고 있는 배우들의 등용문이 됐다. 이제훈과 박정민은 <파수꾼>을 통해 배우로서의 진가를 발휘했고, <아이들>은 구교환의 첫 필모그래피를 장식한 영화다.
특히 이제훈은 <파수꾼>을 통해 제32회 청룡영화상, 제48회 대종상영화제 등에서 신인남우상을 받으며 충무로의 기대주로 등극했다. 이후 그는 <고지전>(2011) <건축학개론>(2012) <박열>(2017) <아이 캔 스피크>(2017) 등 여러 장르를 오가며 다양한 인물들을 연기해 스타성을 입증했다. 윤성현 감독 역시 각종 영화제에서 감독상 및 각본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윤성현은 이후 <사냥의 시간>(2020)을 연출해 다시 한번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 영화는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부문에 초청되기도 했다.
<파수꾼>이 가정과 학교에서 뜨겁게 불화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다뤘다면, 엄태화의 <잉투기>(2013, 장편과정 6기)는 사회와 뜨겁게 불화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조망했다. 이 영화가 개봉했던 시기는 스마트폰 보급이 막 활성화되고 있던 때였다. 과거보다 빠르게 소통할 수 있었지만, 소통의 질 또한 그만큼 낮아졌다. 이에 따라 인터넷 커뮤니티 등 각종 온라인 공간에서는 상대방을 타자화하는 일도 빈번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스마트폰 만지듯 쉽게 다뤄졌다. <잉투기>는 청춘의 불안이라는 한국 독립영화의 오래된 소재를 동시대 흐름 속에서 발칙하게 표현했다.
<잉투기>에는 엄태구, 류혜영, 권율, 박소담, 류준열 등 현재 주연급 배우들의 신인 시절 모습이 담겼다. 특히 주연으로 활약했던 엄태구는 이후 <밀정>(2016) <택시운전사>(2017) <낙원의 밤>(2021) 등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류혜영은 이 영화로 제15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이후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로 대중적 인지도를 쌓았다. 엄태화 감독은 <가려진 시간>(2016)을 거쳐 2023년에 개봉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400만 명 가까운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페미니즘의 물결 속에 탄생한 ‘여성영화’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2018, 장편과정 11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는 2018년 페미니즘 물결이 일었던 시기에 개봉했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여성은 대개 성적으로 대상화되거나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 구도 속에서 단선적으로 묘사됐다. 주체적인 여성이 아닌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역할에만 머물렀다. 영화의 주인공인 자영(최희서)은 공부하고, 먹고, 섹스하는 용도로만 자신의 몸을 사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영은 우연히 달리는 여성의 건강한 신체를 본다. 정주(定住)가 아닌 어딘가로 질주(疾走)하는 여성의 신체에 감읍한 것이다. 그 여성은 바로 현주(안지혜)다.
자영은 현주의 달리는 몸을 보며 전에 없던 감정을 경험한 뒤 8년째 준비하던 행정고시를 그만둔다. 그리고 현주와 함께 달린다. 달리는 과정 속에서 두 여성은 서로에게 위로를 받으며 느슨하지만 따뜻한 연대감을 형성한다. <아워 바디>는 달리는 여성의 몸을 경유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그린다. 영화는 후반부 현주의 죽음을 통해 여성이 그러한 욕망을 실현하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이야기한다. ‘달린다’라는 현주의 운동성을 물려받은 자영이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열어놓고 끝을 맺는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1, 장편과정 14기)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다. 한국영화에서 모성은 ‘아낌없이 퍼주는 존재’로 그려졌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운명을 등에 업은 채 살아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엄마 수경(양말복)은 기괴하다. 우선 영화는 수경이 딸 이정(임지호)을 차로 덮치며 시작한다. 엄마가 딸을 차로 들이받은 것이다. 수경은 급발진을 주장하지만, 이정은 엄마의 행위를 고의로 확신한다. 사실 수경의 행위가 고의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엄마가 딸을 차로 덮쳤다는 사건 자체가 중요하다.
영화는 수경의 욕망을 ‘이기적’이 아닌 ‘인간적’으로 묘사한다. 내가 온전히 자립해야 자식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다는 간명한 이치가 모녀 관계를 통해 드러난다. 이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흔하게 접할 수 없는 뒤틀린 모성을 형상화하며 제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공식 초청받았다. KAFA에서 제작한 작품이 베를린국제영화제에 가는 것은 2016년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 이후로 6년 만이었다. 영화는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상 등 무려 5관왕을 달성하며 국내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다.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상의 심사위원인 베를린국제영화제 포럼 위원장 크리스티나 노르트(Christina Nord)는 “작품 속 모녀 관계는 감독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구현됐으며 두 주연 배우의 놀라운 연기를 보며 때때로 숨이 멎기도 했다”라고 극찬한 바 있다. 영화를 연출한 김세인 감독은 “시나리오 집필 과정에서부터 후반작업에 이르기까지 영화에만 집중할 수 있는 안정적 환경을 만들어준 한국영화아카데미 공이 크다”며 “기쁜 소식을 배우, 스태프, 한국영화아카데미와 나눌 수 있어 감격스럽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동시대와 호흡한 KAFA 장편과정 16기
이처럼 KAFA 장편과정 작품들은 늘 동시대와 절묘하게 호흡했다. 시대의 상황과 기민하게 조응하며 당대의 욕망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때로는 발칙한 상상력을 동원해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기도 했다. 이 같은 흐름은 2022년에 촬영된 KAFA 장편과정 16기와 2023년에 촬영된 17기 작품들에서도 발견된다. 16기의 작품들은 반드시 꿈을 이뤄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류연수 <보이 인 더 풀>), 서울공화국인 한국에서 살아가는 청춘의 존재론적 불안을 형상화하며(장만민 <색소폰>), 이른바 ‘인구소멸’의 초저출산 시대를 블랙코미디로 조망한다(장민준 <딜리버리>).
관계와 소통에 관한 이야기도 눈에 띈다. 조한별의 <된장이>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명품 허세녀 제니(강지영)는 우연찮게 당도한 지리산 시골마을에서 된장이(이주원)라는 소년을 만난다. 제니는 병세가 깊은 할아버지를 간호하고 있는 된장이와 교감하면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썼던 거짓의 가면을 벗어던진다.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진실한 관계와 소통임을 깨닫는다. 올해 6월 개봉했던 임찬익 감독의 <다우렌의 결혼>은 KAFA의 해외 촬영 프로젝트로, 과정은 다르지만 KAFA의 넓어진 시각이 엿보인다. 역시 진실과 거짓, 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고민하는 청춘의 모습을 통해 관계와 소통의 이야기를 전한다.
16기 작품 중 최재영의 <프랑켄슈타인 아버지>는 독특한 부자 관계를 다룬 영화다. 치성(강길우)은 돈을 벌기 위해 의과 대학 시절 정자를 팔았다. 그로부터 17년이 흐르고,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정자로 태어난 아이 영재(이찬유)가 찾아와 손해배상을 요구한다. 자신의 하자에 치성의 책임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치성은 영재의 하자가 자신의 유전자 때문인지 판명하는 실험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치성은 가난했던 자신의 과거와 닮은 영재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의 꿈을 돕기 위해 노력한다.
버려진 자식이 친부모를 찾아간다는 구조는 흔하지만, 팔았던 정자로 태어난 아이가 찾아온다는 구조는 상당히 이채롭다. 그간 충무로에서 부자관계를 다룬 작품이 많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귀한 영화다. 자식이 부모를 찾아가는 구조는 자칫 가족주의를 강화하거나 가부장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팔았던 정자로 태어난 아이와 갈등한다는 설정 아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이 같은 위험성을 피해 간다. 영화는 제19회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비키 유스 섹션에 초청됐다.
오는 7월 24일 극장 개봉하는 이상학의 <엄마의 왕국>(장편과정 16기)은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분에 초청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기억을 잃어가는 엄마 경희(남기애)와 기억을 찾아가는 아들 지욱(한기장)의 이야기를 담은 미스터리 스릴러다. 알츠하이머라는 소재를 통해, 기억하고 잊는다는 행위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장르적으로 유려하게 풀어냈다. 이상학 감독은 “장황한 대사로 내러티브를 설명하기보다는 쇼트 자체의 미학적 힘과 인물의 행동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타인을 이해하는 노력, KAFA 장편과정 17기
지난해 촬영을 마치고 곧 세상의 빛을 보게 될 17기의 영화들에도 눈길이 간다. 가깝고도 먼 관계의 이면을 춤으로 승화하고(김효은 <새벽의 Tango>), 누군가를 믿고 의지하고 싶은 인간의 심리를 스릴러로 풀어내며(이제희 <넌센스>), 꿈과 꿈을 중첩해 오늘날 청춘의 소망을 판타지로 표상한다(이광호 <리틀 드리머즈>). 이 세 작품은 동시대 청년들의 문제의식을 드라마, 스릴러, 판타지 등 장르적으로 풀어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개인의 꿈과 생활에 천착하면서도 타인과의 느슨한 연대를 갈구하는 청년들의 이중적인 모습이 담겼다.
조현서의 <겨울의 빛>과 서은선의 <훈련사>는 청년 세대가 인식하는 가족의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선 <겨울의 빛>은 가족의 안위를 위해 개인의 행복을 후순위로 두어야 하는 다빈(성유빈)이라는 남자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다빈은 한쪽 귀가 들리지 않는 여동생의 등하교를 책임진다. 엄마는 여동생을 위해 농학교가 있는 먼 지역으로 이사를 계획 중이다. 가족과 나, 현실과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다빈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이해와 공감의 가치를 전하며 가족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다.
서은선의 <훈련사>는 반려견 훈련사 하영(최승윤)의 평온한 일상에 갑자기 출몰한 동생 소라(김승화)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혹독하게 자신을 훈련한 하영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라를 콘트롤하려는 이야기이다. 개를 훈련하듯이 타인을 콘트롤하려는 어느 훈련사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심리를 담아냈다. 가족은 무조건 안온한 돌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때론 큰 짐이 되기도 한다. <겨울의 빛>과 <훈련사>는 전통적 가족 관계에 균열 가한다. 이 과정에서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은 타인을 이해하며 소통의 미덕을 전한다.
KAFA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은 한국 독립·예술영화의 발전과 궤를 같이한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한 그들의 영화 속에는 불안에 떠는 내가 있으며 그런 나를 껴안는 당신이 있다. 소재와 장르를 불문하고 이 영화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나와 당신과의 소통이 불안한 삶을 찰나적으로나마 위로하고 평온하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또 상업적 장르영화에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장애인, 퀴어, 노인 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사회적 소수자들의 존재를 환대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KAFA의 정신이자 미덕이다.